1. 머리말
2. 대신라 강경책의 수립
3. 대신라 전투의 전개와 성과
4. 대신라 강경책의 실패와 왕계의 변화
5. 맺음말
요약
관산성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공방은 위덕왕 즉위 초 불안정한 정국을 반영한다. 다만, 국왕 및 왕실 친위부대의 구성과 왜의 지원은 왕권의 안정을 달성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위덕왕 14년을 전후해 전개된 성왕에 대한 대대적 추모 사업은 당시의 안정된 왕권을 보여준다. 위덕왕은 이를 기반으로 대귀족 사씨를 필두로 한 여러 귀족의 협조를 통해 대신라 강경책을 수립하였다. 백제는 위덕왕 34~26년 신라와의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 때 백제는 축성을 통해 '추풍령로'를 봉쇄하자, 신라와 중국 사이의 사신왕래가 일시적이나마 중단되었으며,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이 시기 백제는 주변국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였는데, 이는 대신라 강경책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신라가 '추풍령로'를 재차 확보하자, 백제는 신라에 대해 대대적 공격을 준비하였다. 백제는 아좌를 왜에 파견하여 군사적 지원을 도모함은 물론, 군사적 요충지에 축성작업을 전개하였으며, 대외적으로 수의 고구려 침공시 향도를 자처함으로써 후고를 덜고자 하는 등 신라 침공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백제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고구려의 침공을 가져옴으로써 대규모 신라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위덕왕의 대신라 강격책 실패는, 이에 회의적 입장을 취하던 귀족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시켰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위덕왕 사후 왕제 혜를 옹립함으로써 왕계의 변동이 초래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