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일본에 있어서 율령제 형성의 과정
II. 7세기 일본과 신라·백제
III. 출토문자 자료에서 본 7세기 후반의 일본
IV. 키요미하라(淨御原)령제에서 다이호(大寶)율령제로
V. 7세기말에 있어서 신라와 일본의 관계 재평가
요약
일본에서는 8세기 초 701년에 성립한 다이호율령에 의해 율령법의 큰 골격이 거의 완성되어, 그 이후로는 이 제도를 기본으로 유지하면서 정치가 진행되어 갔다. 다이호율령의 성립에 이르는 과정에서 어느 시기에 어떠한 영향을 받아 율령제의 형성이 진행되었는지를 해명하는 것이, 국가 체제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며, 완성된 율령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일본의 율령제의 형성 과정에서 어느 시기가 중요한가라는 논의는 많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공통되는 생각이 근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7세기 초 견수사 파견 이후에 유학생 등의 지식이 도입된 것이 어느 단계에서 중국 율령제의 모방으로서 결실을 맺는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견수사 파견으로부터 다이호율령 제정까지의 약 100년간을 지금과 같이 중국적 율령제 도입으로의 직선적인 진행으로 보는 역사관 그대로가 좋은 지 어떤 지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8세기 초부터 전반에 걸쳐, 일본 국내의 모든 면에서 당시까지의 양식에서 동시대 중국의 양식으로 바꾸는 가치관의 전환이 일어났다. 여기서 전환되어 간 당시까지의 양식이란, 다이호율령 시행 이전에 일본이 백제나 신라에서 배워왔던 양식이며, 크게 정리하자면 한반도에서 배운 양식으로부터 동시대 중국의 방식으로 명확하게 전환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처음부터 중국적인 것을 목표로 했다고 단락적으로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교섭이 있었던 백제나 신라의 문명을 이용하는 것에 의해 그 이전부터 진행되던 제도의 국가 체제를 만들고, 그 후 보여 왔던 중국 문명의 동시대 모습을 향하여, 701년에 이르러 일본 국내의 모든 면에서 기준을 바꾸어서 완성한 것이 다이호율령제였다고 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일본과 신라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이러한 시대 뒤의 일이다. 발해와 일본의 외교가 시작되면서, 신라와 일본과의 교섭에는 양호하지 않은 사태가 빈번하게 된다. 일본에서는 8세기 견당사로 대표되듯 적극적인 외교가 잘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는데, 신라와의 관계만 흔들리고 있어, 그것은 신라와 일본 관계사 전체 속에서 부정적인 인상을 강하게 심는 요인으로도 되어 있다. 그러나 다이호율령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해서 이해한다면, 7세기말 신라는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그 시점에서 달성된 정치 제도나 문화의 제 측면은 공통의 문화 소산 위에 성립된 것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