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간 자료를 통해 사비시기 백제율령의 일면을 검토하였고, 이 시기 율령들에 보이는 특징을 중심으로 백제율령의 계보를 추정하였다.
먼저 7세기 백제 연령등급제의 용어와 기준 나이, 호적류 장부의 기재 방식 및 부역 징발의 양상이 북위 이래 북조의 것과 유사한 것을 목간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북위 이래로 정의 연령기준이 올라갔으므로, 백제의 율령이 북위의 영향 하에서 처음으로 성립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백제에서는 북위 이전 시기부터 계속 15세의 규정이 나타남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정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전부터 15세가 丁의 연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지하다시피 한대에 백제지역은 한군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렇다면 한대이래의 전통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음으로 도량형을 통해 검토해 보면, 「지약아식미기」에 나타난 大升, 小升은 양의 기준을 늘리는 양제 개혁에 따른 용어로 보인다. 그렇다면 백제에서도 중국왕조의 양제개혁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대체로 대용량의 양제를 사용한 것은 북조왕조이다. 북위 이래 2, 3배의 양제를 사용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백제에서는 6세기 중엽에는 이러한 대용량의 양제가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시점에 도량형의 또 요소인 尺度에서는 남조척의 영향을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분이나 건물의 축조에 사용되는 營造尺이 남조의 것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서로 다른 계통의 도량형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던 것은, 이 시점에 와서 중국적인 제도를 수용하여 백제의 제도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이전 시기부터 중국적인 도량형과 그에 기준한 제도들이 백제에서는 시행되어 왔었고, 필요에 따라 새로운 제도문물을 적극 수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전 시기부터 율령적인 지식이 백제에도 있었으며, 그것이 기존에 백제 내부의 실정에 맞게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제도를 빠르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닌 백제의 토착화 과정을 거쳤다고 보여진다. 이는 「좌관대식기」에 나타난 곡식의 양을 표기하는 방식에서 독특한 표현 양식을 보여주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남북조 두 계통의 율령을 받아들인 것도 백제의 필요에 의하여 취사선택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사비기 백제 율령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