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新羅의 三年山城 축조
Ⅲ. 錦江 유역 세력의 동향
Ⅳ. 高句麗의 금강 유역 진출
Ⅴ. 맺음말
요약
백제와 고구려의 충돌이 계속되던 5세기 후반 신라는 금강 상류 지역에 三年山城과 一牟城을 쌓았다. 그것은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을 계속 받으면서 방어에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자 고구려군의 서진을 방어하고 신라와의 군사협력을 담당하고 있었던 재지세력의 요구가 관철된 것으로 보인다.
금강 중․상류 지역 세력은 5세기 초부터 한강 유역을 통해 서진해 오던 고구려군을 방어하던 집단으로 475년을 전후한 시기에 중앙 정계에 등장하여 웅진도읍기 초기 주요한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신라와의 군사적 협력이 가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친신라적 재지세력으로 苩氏 세력과 沙氏 세력이 주목된다. 이들이 중앙 정계에 두각을 나타냄으로써 향후 동성왕대의 대외정책을 결정짓는 주요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충주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동쪽에서 백제를 압박하던 고구려군은 481년 신라를 직접 공격한 후 484년 웅진을 직접 압박하였다. 484년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공격을 모산성에서 양국의 군사협력으로 일단 저지할 수 있었으나 고구려군의 일부는 청원 지역까지 진출하여 웅진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494년 薩水之原 전투를 통해 고구려군은 백제와 신라 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패퇴하였다. 한강 이남의 경기 남부 지역에 자리한 고구려계 고분은 5세기 후반, 494년 살수지원 전투로 완전히 패퇴하기까지 군사활동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