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율령 연구는 그간 일본에서의 ‘율령국가’ 논의를 기반으로 주로 중앙통치제도와 연관하여 이루어져왔다. 하지만 한국고대사에서 율령 반포를 전후한 변화양상을 검토해 보면 중앙통치제도에서는 획기적인 변화양상을 확인할 수 없다. 오히려 지방지배에서 ‘공납을 매개로 한 간접지배’에서 지방관 파견 등을 수반한 직접지배로 전환하는 것이 확인된다. 이것은 율령의 도입이 중앙정치제도의 정비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전국을 일원화하는 지배방식을 구축하여 제민지배를 달성하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백제 율령의 반포시기는 일원적 지방지배가 이루어지는 시점이라고 추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오방제가 시행되었던 사비기에는 율령적인 지방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 이전의 웅진기에도 지방민들의 편호와 인력동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율령에 기반한 지방지배가 제도적으로는 성립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전국을 일원화하는 지방지배는 한성기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구체적인 시기를 검토해 보자면, 기존에 율령의 반포시기로 많이 주목되었던 4세기 근초고왕-근구수왕대는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제도의 성립은 인정되는 바이지만, 율령 도입의 목적으로 보이는 전국을 일원화하는 직접지방지배가 확인되지 않아 제외된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개로왕대의 지방명을 관칭하는 왕후의 존재이다. 이 왕후제는 일원적인 지방지배의 한 지표라 할 수 있는 지방관 파견의 한 유형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로왕대에는 율령이 도입되어 지방에 대한 직접 지배를 지향하는 체제가 성립하였다고 여겨진다.
다만 개로왕대 이후 웅진기까지 그러한 율령적 지방지배가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제도적으로 일원적 지방지배가 성립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백제가 일시적으로 국망하면서 제도를 실제로 관철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