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백제도호부의 설치(660)와 웅진도독부로의 전환(665)
1) 백제 고지에 대한 당의 구상과 좌절
2) 당과 신라의 맹약 과정
2. 안동도호부의 설치(668)와 웅진도독부의 폐지(671)
3. 안동도호부의 이전(676)과 폐지(698)
1) 나당전쟁의 전개와 안동도호부의 이전
2) 안동도호부의 폐지와 발해의 건국
맺음말
요약
당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백제 고지에 대해 당은 백제도호부를 설치하여 지배하려고 하였지만, 663년 신라와 반분하는 계획으로 전환되어 2년 뒤 실행되었다. 이 무렵 당은 신라를 계림주대도독부로 설정하였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당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웅진도독부의 설치는 신라의 입장에서 약속 위반이었다. 특히 부여융을 중심으로 한 백제 유민의 규합은 백제 부활에 다름 아니었다. 신라와 당의 대립은 고구려 멸망 이후 표출되었다. 나당전쟁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안동도호부는 676년 요동성을 거쳐 이듬해 신성으로 퇴각하였다. 배후를 안정시킨 후 당은 신라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서방의 토번 정벌 문제로 잠시 유보하였다.
신라와 당의 소강상태는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장기화되었다. 보장왕은 681년 이전에 말갈과 통모하다가 유배되었고, 고구려 유민도 강제 이주되었다. 이때 일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은 영주에 잔류하였다. 696년에 이진충의 난이 일어나자 걸걸중상·대조영 부자와 걸사비우는 요동으로 이동하여 진국, 즉 나중의 발해를 건국하였다(698). 발해 건국을 전후하여 안동도호부는 안동도독부로 강등되었다. 나아가 안동도호부의 소멸과 발해의 건국은 신라와 당의 긴장 관계의 해소로 귀결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당의 동방정책에 대한 백제·고구려 유민과 신라의 대응 양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멸망 직후부터 활발하게 일어난 백제 부흥운동은 나당간에 고구려 멸망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존속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백제유민은 웅진도독부에 참여함으로써 백제 부활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고구려 부흥운동은 웅진도독부라는 형태의 백제 부활에 불만을 품은 신라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안동도호부가 동요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요동 지역에서의 부흥운동은 발해 건국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웅진도독부의 설치와 발해의 건국은 당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백제유민의 참여와 고구려 유민의 거부라는 서로 다른 선택의 결과이다. 반면 신라는 당의 논리를 이용하여 대항논리를 내세웠는데, 이는 당 중심의 세계질서를 인정한 위에서 나온 자구책의 일환이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보장왕의 유배 이후에 신라가 안승의 보덕국을 폐지한 것이다. 고구려의 신라 편입이라는 점에서 신라는 일통삼한을 표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고구려는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유민에 불과하고, 요동 지역의 고구려 유민은 발해를 건국하였다.
따라서 당시에 신라가, 엄밀하게 말하면 중대왕실을 비롯한 진골귀족이 표방한 일통삼한 의식은 일종의 허위의식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발해의 건국은 그조차도 근저에서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발해는 미개한 말갈(靺鞨)로 인식되었다. 중세적 정통론과 근대적 만선사학의 무매개적 결합 속에 당연시되어온 통일신라 대신 남북국시대가 한국사에서 설정되어야 하는 근거 중의 하나는 여기에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