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의자왕의 즉위
1. 즉위 과정의 어려움
2. 신라 여인 선화의 아들 의자왕
III. 의자왕 초기 정변에 대한 이해
1. 초기 정변의 성격
2. 풍장과 교기 및 부여풍에 대한 이해
IV. 의자왕 전기의 세력 기반을 통해 본 정국 운영의 특징
1. 의자왕의 세력 기반
2. 정국 운영의 특징
V. 맺음말
요약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었으며,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신라여인 선화와 결혼을 하였다. 백제 유력 왕족의 아들인 서동과 신라 왕족 혹은 귀족의 딸의 결혼이었으므로 역사적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서동 설화의 형태로 민간에 알려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이 선화의 아들이 의자왕이며, 무왕은 즉위 이후 자신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사비지역 출신의 사씨왕비를 새로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근 발견된 미륵사지석탑의 금제사리봉안기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무왕대에는 대신라 공격이 최대의 국정 목표였으므로 신라 왕실을 외가로 둔 의자왕은 사씨왕비와 이복동생들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비교적 늦은 무왕 33에야 의자는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이 과정에 무왕의 아들이자 의자의 이복동색인 풍장이 왜로 보내졌다. 이후 의자는 ‘해동증자’의 모습을 보이며 잘 참고 기다려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의자왕은 재위 2년 만에 자신의 견제 세력이던 모후가 죽자 친위정변을 단행하여, 그 모후와 연결된 왕족․외척과 내좌평 기미를 중심으로 한 무왕 측근 세력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직계 중심의 정치를 확립하였다. 이후 의자왕은 그 어느 시기보다 더 강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귀족 중심의 정치에서 관료 중심의 정치로 백제의 정치를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정변의 과정에서 일본으로 보내진 교기는 앞서 의자와의 태자 경쟁에서 패하여 일본으로 보내진 풍장의 아들(의자왕의 조카)로, 이후 일본에서 활동을 하다가 백제 멸망 후 부흥 백제국의 왕이 되는 부여풍임을 알 수 있었다.
의자왕 전기의 가장 중요한 세력 기반으로는 의자왕의 왕자들(태자 중심)과 무왕대에 유교적 소양이나 군사적 실력을 바탕으로, 22부사를 중심으로 성장한 달솔층을 들 수 있다. 또 대성팔족 중 친왕적인 사씨와 국씨 세력과 왕족에서 분자화한 성씨로 역시 달솔층을 역임한 세력들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들을 고려하여 의자왕 전기 정국 운영의 특징을 살펴보면, 초기 정변의 결과 국왕과 태자를 중심으로 한 정국 운영이 이루어졌고, 대성팔족 세력들이 왕권에의 협력 정도에 따라 세력 분열이 일어났으며, 고위 관직에 새로운 세력이 대거 임명되는 등 국왕의 관료 임명권이 확대되어 왕권 전제화가 추구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대신라전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이러한 왕권 강화 작업을 뒷받침하고자 하였던 시기로 파악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