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해의 방향
2. 建國神話로의 접근
3. 관련 사료의 분석
4. 건국의 시기와 주체세력
5. 始祖傳承의 성립과 변천
6. 맺음말 - 앞으로의 課題
요약
백제사 연구에서 건국신화를 복원하는 노력은 백제국가의 초기모습에 대한 접근 뿐 아니라 부여․고구려와의 문화 전파 및 교류 양상 등 그 계통성을 추정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동안 전승 자료의 분석을 통한 역사적 탐색은 백제 건국신화의 원형을 복원하고 그것을 백제초기 사회와 연관하여 분석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또한 건국신화의 형성과 변천과정을 初期王系의 변화와 결부시키면서 백제 건국의 주체 세력과 그 계통을 해명하였으며, 나아가 초기백제의 국가형성과 사회상에 접근하는 등 연구의 범위가 심화․확대되었다.
백제의 시조전승은 건국의 경로 및 과정의 복잡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며, 부여계 신화의 재탄생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또한 溫祚가 동명왕묘를 세워 숭배한 사실은 동명을 통하여 왕실의 신성성을 구현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본래 온조전승은 日神의 후예인 온조부족과 地神族 계통의 토착부족이 결합하여 형성된 시조신화로 이해된다. 온조 시조전승은 고구려와의 친연성을 강조하며, 비류 시조전승은 부여 계통과의 연결을 강조하였다. 중국사서의 仇台전승은 백제의 부여계 시조설이 부인되지 않고 오히려 국내사서보다 강조되었다. 일본 古史上에 전하는 都慕전승은 넓은 의미에서 부여계 시조로서 관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철기문화를 수반한 백제의 온조와 비류집단은 범부여계 출신으로 졸본지역에 정착하였다가 일봉의 무사단을 이끌고 남하하였는데, 비류집단은 서해연안을 따라 내려오는 해로를, 온조집단은 육로를 통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비류 시조전승은 고이왕대에 재음미되거나 독자의 시조전승으로 체계화되었던 반면, 온조 시조전승은 고이왕계와는 다른 혈연 집단인 근초고왕계가 등장하면서 문자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본다. 이때 정착되었던 백제 건국신화는 동명-온조의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현전하는 주몽-온조로의 변모는 백제 멸망 후 부여의 동명을 고구려의 鄒牟로 이해하는 인식이 반영되었던 신라 통일 이후로 상정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