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위덕왕대 왕권의 강화
3. 무왕대 정치동향과 익산
1) 무왕의 정치기반
2)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와 6부의 설정
4. 익산경영과 그 정치적 의미
5. 맺음말
요약
관산성전투 이후 위덕왕은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대외관계에서 정세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면서 한강유역과 가야지역을 상실한 고립국면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대외관계가 활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국내정치상황이 안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외관계가 14년 이후에 주로 등장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이 시기까지는 대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대외적인 관계를 통하여 왕권을 안정시켜 나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국내적인 왕권의 안정은 사서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능산리사지와 왕흥사지 사리함을 통하여 위덕왕이 부왕의 추복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여 나아간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처럼 위덕왕대는 왕권이 점차 안정되어 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익산세력으로 비정하는 것보다는 위덕왕대의 왕권강화와 관련하여 위축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익산지역에도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대성팔족 중의 하나인 사씨세력과 협력을 통하여 대외적인 관계에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신라와의 대립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대성팔족인 사씨세력과의 협력과 경제적 도움을 받기 위하여 노력했을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최근에 발굴된 ‘六阝五方’銘木簡‘이다. 이 목간에 의하면 백제의 행정구역이 오부에서 육부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익산 왕궁리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의 하한연대가 6세기 중엽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위덕왕대부터 익산을 경영하여 나아갔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익산경영은 관산성전투 패배 이후 약화된 왕권과 지방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귀족세력과의 협력이 필요하였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미륵사 창건이었다. 미륵사의 창건은 彌勒寺址舍利奉安記를 통해 보았을 때 사씨세력의 경제적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도성의 사씨세력의 거점을 개편하면서 도성의 행정구역이 오부에서 육부로 개편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전라남도 지역을 장악하면서 옛 가야지역에 진출하면서 획득한 경제력과 익산세력의 편입은 『三國遺事』 武王條의 백성의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과 황금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남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무왕대 후반에는 사비지역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日本書紀』에 나타나는 의자왕 원년에 일어난 정변기사와 이후에 사씨세력 보다는 신진세력들이 등장하는 것을 통해 보았을 때 사씨세력과의 협력관계가 종식되었을 것이고 이는 익산경영이 지속되지 못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