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등 문헌기록을 통해 보면 백제의 도성은 온조왕대 이래 ‘(하남)위례성’ 단독으로 존재하던 것이 책계왕~비류왕대에 ‘漢城’이란 이름의 새로운 도성으로 확대 재편되어 개로왕대까지 ‘北城’과 ‘南城’의 兩宮城 체제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백제 한성시대 양궁성 제도의 출현은 당시 동아시아 도성 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중국의 진한대 亞宮城 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건국 후 고대국가로 성장하며 대외적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낙랑과 말갈, 고구려 등 북방 세력과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해 왔고, 이들로부터 효율적으로 국가를 방어하기 위한 도성 방어체계의 보강이 불가피하였다. 대내적으로는 고이왕대에 이르러 마한을 병합하면서 왕권을 강화하여 관등제의 정비, 지방통치체제의 재편, 군권의 장악 등 명실상부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이러한 대내외적 요인이 양궁성 제도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던 배경이자 원동력으로 이해된다.
지금까지의 문헌사적․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종합해 볼 때, 백제 한성시대의 양궁성으로는 서울시 송파구에 위치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꼽을 수 있다. 발굴조사 결과로 보건대, 풍납토성은 당시 종교, 정치, 경제, 대외교류의 중심지로서 왕을 중심으로 한 고위층이 거주하던 居城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몽촌토성은 지형적 요인과 구조, 내부에서 발견된 유구와 유물의 특성등을 고려할 때, 비상시에 대비한 군사적인 성격의 防禦城이자 왕족의 별도 거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론적으로 이들을 그 성격과 기능으로 구분하자면 풍납토성이 正宮이고, 몽촌토성이 別宮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