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
2. 왜계백제관료의 출현
3. 왜계백제관료의 실체
4. 왜계백제관료의 활동과 그 성격
5. 결어
요약
왜계백제관료의 발생은 461년 개로왕제 곤지의 왜국 파견과 그의 16년간의 왜지 활동, 왜국에서의 동성왕의 출생과 백제왕 즉위 등 5세기 후반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과 관련되어 백제와 왜왕권간의 우호관계를 더욱 깊게 된것에 기인한다. 동성왕을 수행한 5백여명 인물 속의 일부는 백제의 관료로 편입되었다고 생각된다. 왜국 태생의 동성왕을 측근에서 모셨던 왜인들이야말로 왜계백제관료의 모체이고 이들의 2세대들이 흠명기에 보이는 왜계관료들의 주역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5세기 후반 이후 활발하게 백제에서 왜국으로 이주해 간 백제계 왜인들이 곤지와 같은 백제왕족의 귀국시 동반하여 백제관료로서 발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드은 왜국사정에 밝고 현지 언어에 익숙한 이점을 살려 백제관료와 함께 대왜외교에 실무관료로서 파견되었다.
당시 백제가 처한 국제환경은 금관국의 멸망 이후 친신라적으로 기울고 있는 안라국을 백제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이 와중에서 반백제적 입장에 있던 이른바 임나일본부 관인들을 회유․포섭하는 일이었다. 이들 중 왜계 출신자에 대한 외교적 대응이 왜계백제관료의 주요 임무였다고 생각된다. 북방에서의 고구려와의 전쟁과 신라의 배신으로 한수유역의 상실로 인한 신라와의 대립에서도 왜계백제관료는 대왜 청병사절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의 역할이 외교적 임무에 한정되어 있던 것은 당시의 백제가 처한 특수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성왕의 죽음을 계기로 왜계백제관료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는 것은 성왕대의 대왜정책의 하나의 특색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왕대를 끝으로 왜계 백제관료의 활동이 종료한 것이 아니라, 6세기 전반대만을 다룬 「百濟本紀」라는 사료적 성격 때문에 사료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은 것이지 이들은 이후에도 존속되었다고 생각된다. 대왜정책을 중시하고 있던 백제왕권에서 왜계 출신자의 등용은 역사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다. (필자 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