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은 이미 8세기 무렵부터 일본열도에 문풍을 일으킨 중요한 인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751년 성립되었다고 하는 일본 최고의 한시집 『화풍조』에서도 왕인과 왕진이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전한 인물로 칭송되고 있다. 한문과 유학의 후진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여론에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사실은 일본으로서도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한문과 유학이 전해졌다고 주장하고 싶었을 것은 당연하고, 그런 흐름은 에도시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근대에 들어 왕인의 업적을 크게 평가한 것도 역시 일본 쪽이었다. 즉 왕인에 대한 새로운 신화의 진원지는 일본이었다. 그 신화를 만들어낸 배경에는 내선일체, 즉 일본과 한반도가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던 시대적 분위기가 있었다. 백제나 신라 등과의 교섭과 영향에 대해서도 강조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을 좀 더 빨리 문명화된 세계로 그리고자 했던 시대적 정서도 있었을 것이다. 6세기 초반에 오경박사 등이 경전이나 불경을 전래했다고 하는 것보다 150년 이상 더 앞서는 시기에 『논어』와 『천자문』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선진문물이 전래되었다고 하는 편이 문명화된 일본의 모습을 그리는 데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현전하는 『천자문』 성립시기를 무시하고, 종요의 『천자문』이 있었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식민지지배를 경험한 우리로서도 고대에 백제 등 삼국이 많은 선진문물을 전래해줌으로써 일본열도의 문명화를 이끌어왔다는 이야기는 굴욕감을 치유하는 단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학, 불교, 제철기술 등 많은 선진문물과 기술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전래되었음을 거듭 강조해온 것이다. 일제식민지 기간 동안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연구나 기술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는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관계를 문화전파라는 차원을 넘어 현재까지도 혈연적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현대판’ 혹은 ‘일선동조론의 한국판’이 될 수도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