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資料의 紹介와 判讀
3. 黑齒常之의 生涯와 活動
4. 墓誌銘에 보이는 百濟史의 몇 가지 問題
5. 맺음말
요약
흑치상지 부자의 묘지명은 1929년 10월 하남성 낙양이 망산에서 출토되었다. 이중 흑치상지 묘지명은 도합 41행 1604자이며 구양순체의 매우 단정한 해서풍의 서체로 쓰여진 것으로 약간의 측천무후 시기의 이체자가 포함되어있다. 찬자와 서자는 명기되어있지 않으며 찬자는 그 내용에서 흑치상지와 동 시기에 당의 군에 속해 참의직을 띤 채 활동한 바 있던 인물로 추측된다. 작성연대는 흑치상지 사망 11년후인 당 성력 2년(699) 흑치상지의 묘를 개장할 때이다. 흑치준 묘지명은 26행 642자이며 역시 단정한 해서체로 작성시기는 신룡 2년(708)이다.
이들의 구성을 보면 모두 당대 묘지의 일반적 양식을 따르며 序와 銘으로 구분되나 내용을 기준으로 흑치상지 묘지명은 6단락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題에 해당하며 둘째는 생평에 대한 총괄적 평가, 셋째는 가문의 유래와 품성 및 수학, 넷째는 공적과 역관, 다섯째는 신원과 개장, 여섯째 미괄 형식의 銘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흑치상지의 품성과 자질 및 공적에 대한 수사적 칭공이 주류이다. 흑치준 묘지명은 4단락으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題고 둘째는 가문의 내력과 생평에 대한 평가, 셋째는 그의 품성과 역관 및 사망에 대한 내용을 담으며 마지막은 미괄 형식의 銘이다.
이런 묘지명 기록은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등 흑치상지 열전과 상호보완하여 흑치상지 생애와 활동을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흑치사지의 생애와 활동은 대략 성장 및 수학기-백제 신료로서의 활동기-백제부흥운동의 전개기-당에서의 백제고지 관련 관직 역임기-당의 무장으로의 활동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는 자국의 멸망을 목도한 시료로서 부흥운동을 전개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국에서 무장으로의 능력을 발휘하지만 결국 무고로 인해 죽음을 당하는 비운의 일생을 산 인무로 평가될 수 있다. 구리고 묘지명에는 비록 간략하나 백제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시사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흑치씨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왕족 부여씨의 분지 문제, 달솔이 특정 유력 가문 출신에 의해 대대로 계승된다는 것, 흑치상지 수학과정 기록은 백제 귀족층의 학문적 소양이 상당함을 방증한다.
이외에도 흑치상지가 664년부터 677년까지 약 13년간 당이 백제에 설치하려 했던 행정구역과 관련된 관직 역임 사실은 부여융 예와 더불어 당의 백제고지 지배정책이 백제 출신 구신료를 교묘히 활용하려는데 기조가 있었음을 말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