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의자왕과 대성팔족
III. 신진귀족의 성장
IV. 대성팔족과 신진귀족의 갈등
V. 맺음말
요약
의자왕 15년을 전후하여 좌평관등을 역임한 인물이 퇴거, 귀양, 사사되거나 신라와 내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의자왕과의 정치적 대립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백제의 16관등중 제1관등인 좌평을 역임한 사람들은 대성팔족 출신이었다. 대성팔족은 관산성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한 이후 그 패전 책임을 물어 왕권을 심하게 간섭하였고 이후 무왕~의자왕대 걸쳐 지속적인 왕권강화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마침내 의자왕 2년에는 대성팔족이라고 생각되는 40여명의 고명지인이 귀양보내지게 되고 이때부터 대성팔족 세력은 점차 흔들리게 되었다. 의자왕 15년에는 한강 유역 중심지인 당항성에 접근할 수 있는 신라의 북계 30여성을 점령하였는데 이는 대성팔족이 왕권을 간섭할 수 있던 명분을 제거한 것이다. 이때부터 의자왕은 확실한 전제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같은 전제왕권의 확립은 신진귀족의 도움 아래 가능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신진귀족은 좌평의 정원제에 묶여 달솔 관등에 머무르고만 비대성팔족이었다. 왕권은 대성팔족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귀족과 결탁하게 되었다, 신진귀족 역시 왕권의 비호아래 정치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하고자 하였고 신진귀족으로는 계백, 흑치상지를 찾아볼 수 있다.
신진귀족의 성장은 대성팔족의 세력 약화와 함께 정치권력 구조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고수된 좌평의 정원제가 의자왕 17년 왕서자 41명을 대폭 좌평으로 임명함에 따라 폐지된 것이다. 따라서 장사암회의와 같은 기구를 통해 국정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등 정치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하였던 6좌평의 정치적 권한은 약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의자왕 20년 황산벌 전투에서 달솔 계백의 지휘를 받던 두 좌평을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좌평은 그 정치적 지위가 하락하였다.
이렇게 급변하는 정치변동속에서 백제는 의자왕 20년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맞게 되었고 이를 기회로 정치권력을 회복하고자 했던 대성팔족과 이미 획득한 정치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신진세력의 대립은 치열하였다. 의자왕대 양파의 대립과정에서 발생한 사회불안으로 백제는 대항도 하지 못한 채 나당연합군에 의해 10 여일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