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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기 중국제왕조에서 사여된 국왕봉잔에 관한 검토(三國時期 中國諸王朝에서 賜與된 國王封盞에 관한 檢討)

  • 분류 문헌 > 정치·외교
  • 권호수 제29집
  • 저자 김기덕
  • 발행일 1989년
  • 게재지 논문집
  • 발행처 건국대학교

목차

1. 序言
2. 高句麗 國王의 封爵
3. 百濟 國王의 封爵
4. 新羅 國王의 封爵
5. 結語

요약

중국에서 삼국에 사여한 봉작을 중국왕조 및 삼국의 외교섭사의 시각속에서 살펴보고 개개의 봉작 내용을 살핀 것이다. 남조에서 봉작은 왕작만이 있었으나 북조에서는 공작과 왕작이 같이 수여되었다. 북조에서의 이중봉작은 왕작으로 자국의 독립군왕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작으로 중국의 세계질서에 편입됨을 의미한다. 왕작의 수여는 주변국가들의 실세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공작의 경우 고구려는 요동군공, 백제는 대방군공, 신라는 낙랑군공으로 봉작됨이 원칙이었다. 남조에서 고구려의 봉작시 공작이 같이 수여된 예가 있는데 요동이 아닌 낙랑의 명칭으로 봉작되었다. 공작과 왕작이 같이 수여되는 경우 북조에서는 공작이 먼저 오고 왕작이 왔으나 남조의 경우는 왕작이 먼저 오고 공작이 다음에 왔다.
남북조봉작의 차이는 당시 실세가 북조였음을 감안할 때 남조의 봉작은 보다 관념적이고 북조의 봉작은 보다 실제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북조가 비록 다분히 편의적이고 형식적인 것일지라도 일단 공작으로서 주변국가를 중국의 세계질서에 편입시킨 뒤 왕작으로서 자국의 독립군왕을 인정해주 바면 남조의 경우 왕족으로서 자국의 독립군왕을 인정해줄 뿐 자신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의 편입시도는 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남조의 경우 왕작 다음에 공작이 오는 것은 왕작으로 끝나는 것인데 특별한 경우 공작을 덧붙이는 형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작을 덧붙이는 경우도 당시 고구려가 요동의 실제적 점유자임에도 불구하고 낙랑 명칭으로 봉작함은 역시 남조 공작의 허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수당대 와서도 북조의 봉작 방식이 그대로 이어진다. 단, 당 고조 7년부터 삼국이 다같이 공작이었던 군공에서 왕작인 군왕으로 높여 봉작되는데 이는 당시 삼국의 실세를 반영한 것이다. 통일신라기 성덕왕 12년 봉작을 끝으로 이후에는 신라왕이라는 왕작만 수여된다. 이는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이는 군공을 통한 중국 세계질서 편제방식의 변화를 의미하며 주변국가의 실세를 반영한 것이라 할 것이다.
한편 책봉을 통한 관작사여를 포함하여 당시 동아시아 제국간의 대외교섭에 대한 기본 시각은 크게 책봉체제론, 조공관계론, 역관계론 등으로 요약되며 이를 종합하면 동아시아 지역의 개별국가간 교섭사를 제국가의 내부구조와 관련지어 파악하며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역사 일환으로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필자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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