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요서영유가 이루어졌던 남북조시대는 중국이 극도로 혼란했던 상태였으며 남조와 북조는 서로 적대관계가 유지된 시대로 한반도의 고구려와 백제도 대립 형세였다.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기록 해석을 위해서 동북아시아의 정세파악과 당시 중국인들의 대백제, 고구려관의 이해가 우선이다. 남조는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지리적 위치조차 자세히 기록하지 못하였고 전통적인 낙랑, 대방의 인식에 백제나 고구려에 대한 뚜렷한 관념이 형성되지 못하였다. 북조는 연나라대에 한해 고구려와 백제에 공히 낙랑과 대방이 연루된 혼란이 있었을 뿐이다. 위대부터는 고구려의 왕에겐 요동군공, 백제왕에겐 대방군공을 책봉하는 등 뚜렷한 관념이 형성된 것이다.
결국 진말, 연대의 4세기 후기에는 남북조에서 공히 낙랑과 대방에 대해 백제와 고구려의 대립관계에서 혼동이 있었다. 이런 혼동 이후 송서가 편찬되는 5세기후기에는 백제의 중국과의 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외교적 사료를 발견할 수 있다. 즉, 472년 위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대방태수가 견사되었고 490년 동성왕 자신이 직접 남제에 대방태수 관작을 청구하고 495년 낙랑태수 관작을 청구하며 허락받는 사실이 있다. 이런 백제의 주장은 4세기 중엽부터 대립관계로 접어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며 475년 고구려의 한성점령 후 심화된 듯하다. 송서의 찬자의 4세기 후기의 혼동에 이은 5세기 후기 백제의 낙랑, 대방에 대한 영유권주장 및 허락에 따라 낙랑, 대방의 요서이동을 고구려의 약유요동에 대해 백제의 약유요서로 기록한 듯 하다.
472년 위에 공공연히 대방태수를 견사한 것으로 보아 백제의 이런 주장은 송서를 편찬한 488년 이전에도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다. 남제서 또한 송서와 같은 형태로 생각되며 남제서 백제전에 기록된 위와의 전투기사 역시 고구려와의 전쟁기사로 이해해야 하며 이에 대한 승리에서 당시 적대관계였던 남제에게 관작을 청구하였을 뿐 아니라 낙랑, 대방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남제는 동성왕의 청구대로 인정한 듯하다. 한편 송서나 남제서의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양직공도다. 실제로 백제 요서영유 사실을 낙랑이 행한 것으로 기록했다. 실로 백제의 요서영유를 낙랑과 대방으로 이해하면 위대 이래 북조에서 형성된 대백제,고구려관인 백제왕=대방군공, 고구려왕=요동군공에 대한 자연 스런 이해가 이루어진다. 백제나 고구려에 대한 뚜렷한 관념이 형성되었기에 북조계 사서는 이를 기록할 수 없던 듯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