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가 대부분 조작되었다 하더라고 사실을 기록한 기사도 있다. 우리는 대화왜가 백제에 의해 건국되고 운영되었다 하더라도 대화왜는 문화의 선진국이며 강대국인 고구려 신라에도 유학생을 파견하고 두 나라의 인재를 받아들여 왕실을 교육하는 사람이나 천황의 병을 치료하는 사람가지 임명하기도 하였다. 수많은 고구려, 신라인이 유숙하며 대화왜의 개발과 발전에 공헌했던 것은 사실이며 대화왜의 고구려, 신라 양국에 대한 선망과 기대는 결코 백제에 대한 그것과 별로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의 신라와 왜 관계는 차치하더라도 일본서기에 나타난 신라 물건 선호와 신성시, 해외파견이 전적으로 신라 호의에 의해 가능한 점, 중국유학보다 신라유학을 선호하고 대화왜를 방문하는 신라 사인을 극진히 대우한 기사에 의해 신라와 대화왜의 관계는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백제 멸망가지의 대화왜가 백제 속국의 성격이 강하다면 백제 멸망 후에는 신라 속국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백제가 경영한 대화왜에서 고구려인, 신라인을 차별하지 않고 다같이 한인으로 간주하여 중요 지위도 부여하는 점은 이상할 것 없다. 한반도에서도 백제, 신라, 고구려 삼국 인민이 자유로이 서로 다른 나라로 이주할 수 있었으며 왕을 정점으로 하는 삼국 자체도 삼국시대 후기를 제외하고 대체로 평화적으로 공존하였다. 대화왜에서 이렇게 삼국이 공존할 수 있던 것은 대화왜라는 고대국가의 성격 자체에서 기인한다. 당시 대화왜는 아직 중앙집권화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심적 권위를 가진 왕도 존재하지 않는 몇개 부락 범위의 정치집단이었을 뿐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