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굴곡이 많은 리아시스식 해안이 발달한 지형적 특질을 한껏 활용해서 더 넓은 세계를 호흡하였다. 이와 관련해 조선술과 항해술이 자연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백제의 해외 활동에 관한 문헌 기록 가운데 쟁점이 되고 있는 중국대륙이나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교류를 에워싼 기사를 검토하였다.
백제의 요서경략 기사는 그간 진출 동기가 석연찮았던 관계로 기록의 명료함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을 얻지 못하였다. 당위성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료를 분석하는 과정에 ‘晋末’이 동진말인 420년을 하한으로 한다는 점에서 후연과 백제와의 연계성을 찾을 수 있었다. 후연은 고구려가 400년에 낙동강유역으로 진출한 틈을 타고 기습적으로 그 후방의 700여 리의 땅을 약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고구려의 반격으로 인해 대릉하 일대까지 빼앗기는 위기적인 상황에서 백제에 지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백제군이 요서 지역에 진출하였지만 곧 북연 정권이 등장하여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열었다. 이때 상황이 애매해진 요서 주둔 백제군은 주둔지를 실효지배하였는데, 곧 진평군의 설치인 것이다. 진평군의 존속은 488년~490년에 발생한 백제와 북위와의 군사적 격돌과 무관하지 않다는 심증을 안겨주었다. 『신당서』에서 백제의 서쪽 경계를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를 가리키는 越州로 지목한 것은 남중국 세계에도 일정한 연관성을 맺었음을 뜻한다. 백제가 吳越을 공략하였다는 기록과 무관하지 않을뿐더러 이러한 기사를 부정할 만한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겸익의 중인도 래왕이 사실이라면 흑치의 소재지를 필리핀으로 지목하는 견해가 허황될 리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흑치의 소재지를 충청남도 예산으로 비정한 견해의 허구성을 낱낱이 밝혔기 때문에 흑치=예산설은 더 이상 존립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와 부남국인 캄보디아와의 교류도 중국 경유설의 허구성을 밝혔다. 부남국은 539년에 중국의 양과의 교류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543년에 부남의 재물과 奴를 왜로 보내었다. 이로 보더라도 백제가 양을 경유해서 부남의 재물을 간접적으로 취득했다는 주장의 허구성이 드러났다. 끝으로 최근 부여군 능산리 절터에서 확인된 면직물의 유입로에 관한 단서도 얻을 수 있었다. 이 면직물의 기원을 중국이나 중앙아시아로 지목하였지만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였다. 백제는 線種을 일본열도에 전래해 준 菎崙이나 목면의 원산지인 인도와 교류한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백제 면직물의 기원은 동남아시아로 밝혀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백제의 해양 활동에 관한 기록을 검증함으로써 전통시대의 한국 역사상 백제야말로 가장 광활한 영역을 누비고 다녔던 국가로 밝혀졌다. 백제 문화의 국제성과 광대한 세계관이 갖추어진 공간적 범위가 확인된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