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왕대에는 성왕의 관산성 패전을 극복하고 다시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행할 만큼 국력을 회복하고 있다. 이 시기 백제가 신라 내부 깊숙이까지 침투해 들어가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은 지방 및 중앙세력의 힘을 하나로 결집한 데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신라 서진의 압력이 강했던 시기로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전북지역 세력의 결집이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곳이 익산지역이다.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북지역 세력이 본격적으로 백제에 편입된 시기는 5세기 중반 이후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횡구식석실묘'이다. 이는 입점리 1호분의 무덤양식과 부장유물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백제는 이러한 위세품의 사여를 통해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전북지역을 직접지배권으로 편입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익산세력이 백제의 왕경세력으로 편입된 것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으로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六阜 五方銘 목간이 있다. 이 목간은 백제의 수도행정구역체제가 5부에서 6부체제로 바뀌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당시 백제 도성에서 행해진 部制는 지배세력에 대한 회유나 통제를 기본 목적으로 하였으며, 이런 목적을 가진 部가 신설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지배세력의 등장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때 새롭게 등장한 세력은 익산을 중심으로 한 전북지역의 유력한 세력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가 이렇게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전북지역을 확보하고자 한 것은 562년 대가야의 멸망 이후 급격히 증가한 신라의 서진으로 인한 압박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백제와 신라사이의 긴장관계로 인해 전북지역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으며, 이들 위해 백제는 익산세력을 왕실세력으로 편입시키게 되었고, 이는 무왕의 어머니와 법왕과의 혼인을 통한 결합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후 혜왕-법왕-무왕으로 이루어지는 혜왕계의 왕위계승에 일정 부분 일조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위덕왕에서 혜왕으로 이루어지는 왕위계승은 비정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무왕 즉위 초기에는 왕권이 공고한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며, 무왕 초 이루어진 아막성 전투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전투는 중앙귀족세력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를 계기로 무왕계 세력은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는 무왕 24년을 전후한 시점에 본격화되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백제 내부의 정치세력의 변동이 있었음을 나타내며 이는 무왕 후반기 이후 의자왕까지 이어지는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통해 알 수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