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웅진시기 백제 정국과 양과의 교섭
III. 대통사 관련 사료의 검토와 창건 시기
IV. 성왕대 대통사 창건과 그 의미
V. 맺음말
요약
웅진시기 사찰의 창건 기록이나 유적을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三國遺事』 興法 第3 原宗興法 厭髑滅身條의 성왕 5년(527)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대통사는 백제 사찰 가운데 그 창건 연대와 흔적을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사찰이 된다. 따라서 이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대통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제 강점기 이래 관련 유물의 반출을 근거로 현재의 공주시 반죽동 일대로 비정하고 있으나, 사지와 관련된 직접적인 유구나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현재 대통사의 존재를 확실히 알려주고 있는 기록인 『三國遺事』 興法 第3 原宗興法 厭髑滅身條를 근거로 웅진시기의 정국과 관련해 梁과의 교류 속에서 진행된 대통사의 창건과정과 그 의미를 모색해 보았다.
백제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양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무령왕과 성왕은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을 받으면서 우호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견제와 함께 중국의 불교문화 및 다양한 기술 들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특히 무령왕대 대고구려 정책의 실효성과 웅진 천도 이후의 안정, 그리고 양을 통한 불교의 이해와 불교 문화의 수용을 바탕으로 성왕 5년인 527년에 사찰을 창건하고 대통사라고 명명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백제의 대통사가 창건되는 527년과 같은 시기에 신라에서도 법흥왕이 흥륜사를 창건하고 있다. 백제와 신라 양국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사찰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찰이 527년에 창건되었으며 같은 기술로 제작된 기와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대통사와 흥륜사 창건에서 찾아지는 공통점은 바로 양의 교류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이 양과 백제 사이에서 이루어진 문화적 네트워크는 신라와 일본 열도로까지 확대되었다.
백제는 양으로부터 받은 선진문물과 제도를 최대한 활용하여 신라와 왜를 견지하면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주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인다. 또한 대통사는 성왕이 창건한 많은 사찰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이를 단초로 해서 백제 불교가 융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대통사 창건은 백제 불교사에 있어서도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성왕은 대통사 창건을 통하여 백제 불국토 건설의 꿈을 이루고자 하였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왕은 대통사 창건을 통하여 백제 내에서 왕권의 강화를 꿰하였다고 보인다. 대통사의 창건은 양과의 정치․문화적 유대를 통해 백제 국가의 위상을 강화시켰으며, 성왕이 사비로 천도를 할 수 있는 정치적․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대통사의 창건은 이후 백제 불교의 융성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성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