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침류왕대의 주변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요동장악
III. 진사왕대의 내정과 고구려와의 공방
IV. 맺음말
요약
고구려는 고국양왕 2년(385) 6월에 4만명의 군사로 요동과 현토를 차지했다. 여기에서 살피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371년 고구려 고국원왕의 전사 이후 숙적이 되었다. 고구려는 백제가 불교 공인을 계기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백제를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 대신 고구려는 요동과 현토를 공격해 차지했다. 이렇게 고구려가 먼저 이 지역을 공격 한 것은 북중국에서 전진의 쇠락으로, 요동과 현토에 대한 점령이 용이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요동지역이 가진 풍부한 철 때문이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우위를 확보함에 있어 이 지역에 대한 지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385년 11월에, 고구려는 후연의 모용농이 이끈 대군에게 요동, 현토의 두 군을 다시 빼앗겼다. 이 점은 고구려의 군사적인 역량이 새로 일어난 후연에게 미치지 못했음을 말한다.
한편 고구려는 고국양왕 9년(392) 봄에, 신라의 왕족인 실성을 인질로 받아들여 관계를 밀접하게 했다. 그 결과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공격에 그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 곧 이어 광개토왕은 즉위년(392) 7월에, 남쪽으로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해, 10개의 성을 뺐었다.
침류왕의 뒤를 이어 태자인 아신이 즉위하지 못하고, 진사왕이 즉위했다(385). 진사왕은 아신이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찬탈했다. 진사왕은 즉위한 이듬해에 고구려에 대한 방어를 위해 關防을 설치하고, 6년에 고구려의 도곤(압)성을 함락시켰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고구려에 대한 정책을 펼쳤던 진사왕은 7년(391) 정월에 궁실을 중수했다. 그리고 그는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서 이상한 짐승과 화초를 길렀다. 이러한 행위를 위해 백성들은 과중한 요역을 제공해야만 했다. 진사왕의 행위는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더욱이 진사왕이 즉위 할 때에 어렸던 아신은 진사왕 7년 무렵에는 이미 자신의 지원세력을 가질 만큼 성장했다. 이 점은 진사왕 7년에 두 번에 걸쳐 아신을 의식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점은 왕권이 동요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듬해인 진사왕 8년(392), 고구려 군대의 공격에 백제는 10여개 성이 함락되고 전략적 요충지인 관미성마저 빼앗겼다. 그럼에도 진사왕은 고구려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이 점은 진사왕이 민심의 이반과 아신측의 반란 기도를 의식해, 고구려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음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커다란 교훈이다. 결국 고구려는 진사왕과 정치적 라이벌로 왕권을 견제하던 아신의 분열을 이용해 백제에 대한 공격을 성공시켰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