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문주왕의 피살과 해구의 반란
III. 유동성왕의 즉위 과정
1. 동성왕의 옹립 배경
2. 곤지의 자에 대한 분석
3. 동성왕의 귀국 시점
IV. 맺음말
요약
무령왕릉 매지권을 단서로 한 한성말․웅진성 도읍초기 백제 왕계의 오류가 밝혀졌다. 그로 인해 國難期였던 웅진성 도읍기의 정치적 역학관계도 새롭게 조명받게 되었다. 우선 문주왕의 피살과 삼근왕의 短命 직후 즉위한 동성왕의 즉위 배경에 대해 倭 세력과 백제 조정의 眞氏 세력의 결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그러한 동성왕은 일본열도에 세력 기반을 구축한 곤지의 第2子로 알려졌다. 곤지가 河內飛鳥 일대에 기반을 구축한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 있다. 그런데 곤지의 5子 중 동성왕이 옹립된 배경에 대해서는 무녕왕이 庶子인데 반해 동성왕은 嫡子이고, 문무겸비한 총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백제 중흥에 적임자라는 현실 판단에 기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옹립은 국왕 후보자의 聰明 보다는 지원 세력의 이해득실이 1차 요인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동성왕의 경우도 他國인 왜국에서 거주한데다가 幼年이었다. 동성왕은 국내 실정에 어둡고 다루기 용이한 연령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동성왕 옹립의 주된 배경이었던 것으로 간주하는 게 타당할 듯하다. 이와 더불어『일본서기』에서는 479년 4월에 동성왕이 귀국했다고 적혀 있다. 이때 귀국한 동성왕은 그해 11월에 삼근왕을 죽이고 즉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는 삼근왕이 479년 4월 이전에 사망함에 따라 동성왕이 옹립되어 귀국했다. 그런데 환국한 동성왕이 즉각 즉위할 수 없는 변수가 도사리고 있었다. 解氏 殘黨과 南遷 귀족 일부가 곤지의 다른 왕자를 옹립하여 저항했던 것 같다. 그러한 왕위계승 분쟁을 정리하고 동성왕이 즉위한 시점이 479년 11월이었다. 그런데 칭원법과는 무관하게 삼근왕 사망과 동성왕 즉위간의 공백을 메워 동성왕 즉위의 흠결을 없애기 위한 차원에서 삼근왕의 사망을 479년 11월로 설정한 것으로 밝혔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