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5세기 왕실간의 교류
3. 6~7세시 왕실간의 교류
4. 百濟와 倭 왕실 관계의 성격
5. 맺음말
요약
本考는 사료상에 나타난 百濟와 倭 왕실의 왕족 간 인적 교류를 통한 화친 및 혼인 관계에 주목하여 백제와 왜의 관계에 대해 재조명해보고자 하였다.
백제와 왜 왕실 간에 이루어졌던 왕족의 교류는 397년 아신왕대의 전지의 파견 이래 백제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즉, 백제와 왜가 軋轢을 보였던 毗有王과 三斤王의 치세 및 倭가 외교적 다변화 양상을 보였던 6세기 후반 이후 잠시 교류의 단절을 보이고 있지만, 豊璋의 파견까지 이루어지면서 결과적으로는 백제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백제와 왜 간에 있었던 왕족 외교에 대한 일본학계의 통설은 약소국이 강대국에 보내는 인질로 이해되어 정치적, 군사적인 지배와 복속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시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백제와 왜 왕실 간에 이루어졌던 왕족 교류를 분석한 결과, 대체적으로 혼인을 통한 화친이 있었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本考의 분석 결과, 백제와 왜 간에 있었던 왕실 간의 교류를 야마토 왕실에 의한 지배, 복속 및 책봉관계로 보고 있는 기존 일본학계의 견해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百濟와 倭는 아신왕대 이후 혼인을 통한 왕실 교류를 기본으로 한 인적 교류가 원인이 되어 양국의 관계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이러한 인적 교류를 통해 정치적 혹은 군사적 화친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럼으로써 왜에 친백제 세력을 확립하고 역으로 백제에 친왜국 세력을 도모하여 양국 화친의 기반을 이루었다. 이러한 화친을 기반으로 해서 백제에서 왜로 선진문물이 전해지고 한반도의 전쟁에 있어서 백재의 요청시 왜의 구원병이 파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백제와 왜 왕실의 관계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벌어졌던 혼인을 매개로 한 화친 외교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