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導言
II. 교섭과 교류의 대상 확대
1. 북위와의 교섭과 교류
2. 中印度에로의 謙益 파견과 梵文 律部의 도입
III. 무령왕대의 문화적 力量
1. 백제 興輪寺와 신라 興輪寺
2. 律部의 번역과 그 의미
IV. '更爲彊國' 선언과 大王의식
1. '更爲彊國'의 선언
2. 大王의식
V. 寧東大將軍․百濟王과 龍紋裝飾大刀·金銅冠
: 맺음말에 대신하여
요약
무령왕은 대외적으로는 교섭과 교류의 대상을 확대하여 남조뿐만 아니라 북조와도 교섭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북위의 문물도 받아들였다. 이는 성왕이 사비천도를 하면서 세운 중심사찰인 정림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절의 이름은 남조의 정림사에서 따온 것이지만 가람 배치는 북위 낙양성의 영녕사를 모델로 한 것이다. 따라서 성왕의 사비도성 계획은 남조의 건강성과 북위의 낙양성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무령왕은 남조 양나라에 승려 발정을 파견하고 동시에 멀리 인도에도 승려 겸익을 파견하였다. 겸익은 인도에 가서 5년 동안 공부를 한 후 律部를 가지고 왔다. 성왕은 이 율부를 변역하게 하고 주석을 달게 하여 백제 신률을 성립시켰다. 이는 백제 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는 433년에 고구려의 압박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제라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우호관계는 무령왕 대에도 이어졌다. 신라가 521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때 백제의 도움을 받은 것이 그 사례가 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백제 문화는 신라에 영향을 주었다.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후 지은 최초의 사찰 이름을 흥륜사로 하고 여기에 미륵불을 모신 것은 백제 흥륜사를 모델로 한 것이다.
무령왕은 정치적 안정을 통해 왕권을 강화한 후 고구려를 여러 차례 격파하여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주변국들을 소국으로 불렀다. 이를 통해 무령왕은 국제무대에서 백제의 위상을 높였다.
무령왕릉묘지석에는 왕의 죽음을 “붕”으로 표기하고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을 “대왕폐하”라고 부르고 있다. 폐하와 붕은 천자에게만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럼에도 무령왕의 죽음을 붕이라 한 것은 무령왕이 외교적으로 중국 왕조에 대해 제후적 입장을 취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황제로서의 위상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이 위상에 걸 맞는 칭호가 대왕이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