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웅진으로의 천도와 웅진기의 재천도 추진
III. 동성왕의 남방 경영과 익산
IV. 동성왕의 사비천도 추진과 백가의 반란
V. 맺음말
요약
고구려의 침입으로 한성이 함락된 후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다. 그리고 60여년 만인 성왕 16년 다시 사비로 재천도한다. 사비로의 재천도는 재난상황에서 황급하게 이루어진 웅진천도와는 달리 천도 필요성에 대한 논의, 천도대상지의 모색과 천도 준비 등 제반 과정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고구려 위나암 천도 기록을 통하여 본다면 도성을 옮기는 천도 과정에서는 찬반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수반되곤 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본기 웅진기의 기록들을 보면 사비천도의 추진 역시 일관되게 그리고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 같지 않다. 천도준비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왕은 웅진시대의 다섯 왕 가운데 동성왕 뿐이다
동성왕의 경우 사비 뿐 아니라 무진주에 이르는 남방에 대한 경영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익산에 대한 관심이 컸다. 익산 지역의 유적과 유물들이 보여주는 익산 지방세력의 존재나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 조영 세력은 웅진으로의 천도를 계기로 지리적으로 보다 가까워진 중앙과 긴밀하게 접촉했었던 듯 하다. 동성왕대에 남쪽 해안지역에서 合穎禾를 헌상했던 일이나 동성왕의 무진주 출병이 그러한 사정을 전해주고 있다. 이에 따라 이 글에서는 우선 사비 천도와 관련하여 비판적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 백가를 중심으로 한 백씨의 세력 기반이 익산 일대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익산과 사비를 포함한 남방경영에 정력적인 힘을 기울였던 동성왕의 사비천도 준비는 苩加가 동성왕을 시해함으로서 중단된다. 그 시해사건의 시공간적 배경을 통해 볼 때 백가의 동성왕 시해는 천도대상지에 대한 입장대립에서 비롯된 정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성왕의 익산에 대한 경영과정과 백가가 배치된 가림성의 위치, 백가의 정변 등에 주목하면 백가의 苩氏는 익산을 기반으로 한 신진귀족으로서 익산으로의 천도를 희망했던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웅진기의 재천도 추진은 국왕의 시해라는 정변에 의해 일단 중단된다. 백제본기에서는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대와 성왕대에 사비천도의 추진과정을 읽을 수 없다. 백제본기에 따르면 이 두 왕은 고구려에 대비하는 북방 경영에 주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무령왕, 성왕의 두 왕이 남방경영에 적극적이었던 동성왕과 달리 북방영토 회복을 가장 중요한 국가적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梁에 보낸 국서에서 ‘累破高句麗...更爲强國’을 선언했던 것은 이 두 왕대의 그러한 영토적 지향을 반영하고 있다. 때문에 백제본기에 의하면 사전 준비과정 없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성왕 16년의 천도단행은 천도 직전 전개된 고구려와의 戰勢 변화에 영향을 받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때의 천도 단행은 동성왕대에 이미 준비되었던 천도사업을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