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막성 전투가 국지전이 아니라 왜와 연계된 국제전이었음을 밝히고자 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601년에서 603년까지의 사건들을 시간대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01년 3월 왜왕은 大伴連囓을 고구려, 坂本臣糠手를 백제에 파견하여 신라를 협격하자고 제안했다. 그해 가을 9월에 신라의 간첩 迦摩多가 對馬島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왜국에서 신라를 칠 것을 구체적으로 의논하였다. 602년 2월에 聖德太子의 동생 來目皇子를 장군으로 삼고, 그에게 군사 2만 5천 명이 주어졌다. 그해 4월 장군 來目皇子가 큐슈 筑紫에 도착하였고, 선박을 모으고 군량을 날랐다. 같은 해 6월 고구려에 갔던 大伴連囓이 백제로 가서 坂本臣糠手와 합류하여 함께 왜국으로 귀국했다.
8월 백제 무왕이 백제군 선봉대를 보내 아막성을 포위했다. 왜국은 파병연기를 했고 결론적으로 신라가 백제군을 전멸시켰다. 그러나 왜국은 고의적으로 백제와 신라 협격(602년 8월)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닌 듯하다.
603년 8월 고구려가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고구려는 1달 전 왜군이 筑紫에서 철수한 사실을 감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신라 진평왕이 직접 병력 1만을 차출해 고구려에 포위된 북한산성을 구원하자 사실을 직감했을 것이다. 고구려는 곧바로 병력을 철수시켰다.
602년에 고구려・백제・왜 3국이 동시다발적으로 신라를 침공하기로 합의 했지만, 정작 신라협격계획을 제안한 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고구려는 1년 동안 늑장을 부렸다. 약속을 정확히 준수한 백제만이 신라에 패배하여 4만의 병력을 상실하는 재앙을 맞았다. 608년 백제의 倭使 소지 수황제 국서 탈취사건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고구려-백제-왜의 포위 공격을 잘 극복했지만 신라는 그것이 다시 재현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후에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의 양면공격을 지속적으로 받았고, 그때마다 수당과 동맹을 모색했다. 660년 이후 신라와 동맹을 맺은 당과 고구려・백제와 연합한 왜가 한반도에서 충돌하는 소위 동아시아 세계대전의 싹이 아막성 전투에서 보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