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언
II. 의자왕 관련 기록의 문제점
III. 술과 삼천궁녀에 가려진 의자왕의 진실
IV. 신라에 대한 강경책과 동아시아 구제질서의 재편성
V. 당나라와의 갈등 및 자주외교노선
VI. 정계개편과 의자왕의 후회
VII. 결어
요약
40세 이후 왕의 자리에 오른 의자왕은 적극적으로 통치에 힘썼다. 즉위하자마자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고 중국과 고구려 및 일본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본고에서는 의자왕의 이러한 통치행위 가운데 대중국(對中國) 외교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았다.
두 가지 내용을 기준으로 삼아 의자왕대 대중외교의 성격을 검토해 보았다. 첫째는 의자왕이 신라의 적극적인 외교공세로 대중외교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를 포기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는 의자왕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위기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구려와 손을 잡은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숨은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 얻게 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신라에 대한 공격을 무엇보다 우선시했던 의자왕은 당 태종이 이것을 문제 삼자 대외정책 기본노선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선택은 중국과의 관계를 위해 신라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중국의 요구를 무시하고 신라공격을 강행해 나가느냐에 있었다. 의자왕은 중국과의 관계를 끊고 고구려 및 일본과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는 자주외교 노선을 스스로 선택했다. 내부적으로 반대가 있자 정계개편까지 단행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격을 고집했다.
결국 신라에 대한 공격을 위해 중국과의 교류를 끊을 정도로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의자왕의 자주외교 노선이 중국이나 신라 입장에서는 의자왕을 국제사회의 문제아로 인식되게 했을 것이고, 내부적으로 일어난 정계개편의 강한 회오리바람은 이에 반대하거나 이로 인해 손해를 본 사람들로부터 의자왕의 정치가 혹평을 받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술과 삼천궁녀에 얽힌 타락의 모습과 달리 의자왕이 자주외교 노선과 정계 개편을 거쳐 내부기반을 다진 뒤 다시 신라를 공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의자왕의 계산과 달리 중국의 뜻에 반하는 이때의 신라공격은 당나라의 군사개입을 불러와 백제가 붕괴될 수밖에 없는 불행을 초래하였다.
성공적인 국내정치의 기반 위에서 신라에 대한 집요한 공격과 이를 위해 중국과의 외교관계까지 끊는 등 스스로를 국제사회의 문제아로 만들었다가 끝내는 중국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은 의자왕을 어떻게 평가해주어야 할까?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