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倭王權과 北九州
Ⅲ. 火葦北國造와 백제
Ⅳ. 筑紫君 磐井과 신라
Ⅴ. 有明海 호족과 백제․영산강사회
Ⅵ. 的臣과 가야
Ⅶ. 맺음말
요약
고대의 구주지역과 한반도와의 교류는 有明海지역으로부터 筑後川을 따라 산재한 호족들이 활발하였다. 특히 江田船山古墳의 피장자는 왜왕권과의 상하관계를 맺으면서 백제, 가야지역과도 교류하는 다원적 교류를 행하였다. 이 지역 호족들에게는 특정 왕권에 의해 규제받지 않는 시기에 지역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영산강사회에서 나타나는 전방후원분의 존재, 국제성을 띤 복합적 문화현상은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전 북구주 등 동아시아해역의 활발한 대외교류를 말해주고 있다.
6세기 이후 왜왕권의 성장에 따른 북구주에의 정치군사적 압박은 八女지역의 수장 반정을 맹주로 하는 지역정권의 연합을 초래하게 되고 왜왕권에 대항하게 된다. 이미 반정은 북구주의 博多灣에 대외교류의 전진기지를 설치하였고 신라와도 통교하는 등 지역정권으로서의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왜왕권은 구주지역에 대한 지배체제의 구축을 위해 那津官家를 설치하였다. 이후 구주의 호족들의 대외교섭권 및 동아시아해역의 교류의 다원성도 살아지게 된다.
북구주는 지역세력의 성장에 유리한 환경 속에서 일본고대국가형성기에 선진지역으로서 번영했지만,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주요 목표가 한반도와의 교류였고 동방으로의 영토적 통합에 대한 지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열도내의 2개의 세력은 선진문물 수용이라는 외적 목표는 동일했지만, 외적 자극에 대한 내적 대응의 차이가 왜왕권의 통일, 북구주의 몰락이라는 상황을 초래했다고 생각된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