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I. 가야사 속의 낙동강
II. 가라·신라 우호관계의 추이
III. 가라와 '나제동맹'의 대립
맺음말
요약
5세기까지도 낙동강은 여전히 가라와 그 주변국들을 연결하는 교통로 즉 수로로서의 기능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6세기는 513년∼516년 백제에게 기문을 잃고, 그 과정에서 ‘나제동맹’ 체제의 본질을 간파한 가라가 신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축성하던 시기였다. 가라와 신라의 자연경계선이었던 낙동강은 이때부터 양국 간 긴장관계를 의미하는 군사분계선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22년 맺어진 ‘가라․신라 혼인동맹’을 고려하면 낙동강은 긴장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양국의 사절이 왕래하는 교통로로서의 기능을 어느 정도 회복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529년 3월 이전 ‘가라․신라 혼인동맹’이 결렬되고 529년 3월에 가라는 재차 백제에게 대사를, 신라에게 ‘3성과 북경 5성’을 잃게 된다. 532년을 전후해서 탁기탄․가락국․탁순이 차례로 신라에게 병합되기도 하였다. 이후 낙동강은 가라의 핵심지역인 고령의 방어선으로만 기능하게 되고, 그 하류는 신라의 통제하로 들어갔다. 낙동강 하류의 통제권을 잃으면서 가라는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 것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