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의자왕 전기 정치세력과 대외관계
2. 의자왕 후기 정치세력과 대외관계의 변화
맺음말
요약
의자왕이 백제 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무왕 33년 그가 태자로 책봉되면서였다. 무왕의 원자임에도 불구하고 30세가 넘은 나이에 태자에 책봉되었다는 것은 그의 집권과정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의자왕은 장군 사걸과 사택왕후, 사택지적을 축으로 하는 지지기반이 있었기에 집권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가 집권 초부터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익산세력을 비롯하여 그에게 위협이 되는 세력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의자왕은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친위정변을 단행하였고, 이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한편 무왕대 후반부터 의자왕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그 이전 세력과 대외정책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는 특히 대신라정책에서 차이가 보이는데, 무왕 후기의 세력은 신라에 대해 보다 적대적인 정책을 보였다. 이는 의자왕 즉위 이후에 더욱 본격화되어 당 및 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고구려와 화친을 맺는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쳐 나간다. 이를 통해 의자왕은 대신라전에서의 우위를 계속하여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자왕 15년 왕의 음황탐락 기사와 흥수, 의직 등 충신에 대한 홀대는 일정 시점에 정치세력이 변화하였음을 보여준다. 기존에는 이들 기록을 백제를 멸망의 길로 이끈 의자왕의 대표적 실정으로 파악하였으나, 정치세력의 변화에 따른 혼란상을 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정치세력의 변화는 의자왕이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성과 당시 은고, 상영, 충승 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내부에서의 정치세력의 변화는 대외정책에서도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으며, 이는 당과 왜 등의 대내외 정세변화와 맞물려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신라와 긴장관계에 있었던 백제로서는 고구려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당이나 왜와의 관계도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의 화친을 경계한 당과 백제의 공세를 막기 위해 당의 힘이 필요했던 신라의 이해관계가 합치되면서 652년 이후 백제는 당과 관계가 단절된다. 이로 인해 백제는 왜와의 관계가 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 그런데 왜 역시 대화개신을 통해 새로운 정권이 등장한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일정 시기동안 백제와 왜의 관계가 단절되기도 하면서 백제로써는 왜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보다 공고하게 엮어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고, 그때 등장한 인물이 무왕 32년 의자왕에 의해 왜에 인질로 보내진 부여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여풍과의 연계를 위해서는 무왕 후기 이후 의자왕과 함께 한 세력이 아닌 다른 세력이 필요하였으며, 의자왕 후기 세력은 이 과정에서 풍과의 연계를 통해 중앙정계에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자왕대 정치세력의 변동은 결국 의자왕 말기 나당연합군의 공격이 이루어질 당시 극심하게 대립하게 되면서 백제가 멸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