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 32년(631) 왜에 파견된 백제군 풍장은 왜에서 높은 수준의 백제 문화를 펼쳐 보였다. 효덕조정이 백치 출현을 계기로 맨 처음 풍장에게 백치 출현의 의미를 문의하였다. 그는 후한시대의 사례를 들어 백치가 상서임을 암시하는 말을 하여 상서 논의를 진전시켰다. 이것은 그가 유학 경전만이 아니라 후한시대의 여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학 교육이 성행했던 백제에서는 귀족들은 유학경전을 배우고 다음에 역사서를 읽었다.
백치가 상서임을 확신한 효덕 조정에서는 백치 개원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효덕은 대내적으로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대외적으로는 왜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개원 의식을 집전하였다. 이 의식에 참가한 풍장은 백제의 외교력을 총동원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 의식이 거행된 이후 효덕 조정에서는 외교정책면에서 대전환을 하였다. 대화연간(645-649)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신라와 외교관계를 활발히 진행하던 왜는 백치 개원 의식 이후 한반도 삼국에 사신을 전혀 파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서에 백제와 효덕 조정 사이에 사신을 교환한 사실이 없는 데도 의자왕 13년(653)에 백제는 왜와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것은 풍장이 왜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왜에서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를 강화하는데 힘썼던 풍장의 높은 위상과 역량이 후일 백제부흥을 도모할 수 있는 자산이 되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