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백제 요서 영유 관련 사료의 이해
1. 기존의 이해
2. 백제 요서 영유 관련 사료의 가치 문제
III. '백제군'의 실체
1. 백제의 요서 영유 범위에 대한 기존의 이해
2. 백제의 요서 영유 시기에 대한 기존의 이해
3. '백제군'의 실체
IV. 맺음말
요약
百濟의 遼西 領有를 전하는 史書 가운데 『宋書』, 『梁書』, 『梁職貢圖』가 주목을 받아 왔다. 『梁書』가 『梁職貢圖』를 참조한 것처럼 『宋書』도 당시 존재하였을 職貢圖 계열의 畵帖을 참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宋書』가 비록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이지만, 『梁職貢圖』가 梁 당대에 편찬된 原始資料인 까닭에 사료적 가치가 더 높다고 생각된다. 百濟의 遼西 領有에 관한 기사 중 『宋書』·『梁職貢圖』와 『梁書』의 차이점은 “自置百濟郡(스스로 百濟郡을 설치하다)”이란 구절의 유무로, 이 구절이 『宋書』와 『梁職貢圖』에는 없는 반면에 『梁書』에는 있는 것이다. “自置百濟郡”이란 구절은 『南齊書』에 처음으로 보이는데, 『南齊書』에는 百濟의 遼西 領有에 관한 기사가 없기 때문에 百濟의 遼西 領有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梁書』에서는 이전의 史書를 정리하여 서술하는 과정에서 “自置百濟郡”이란 구절을 百濟의 遼西 領有에 관한 기사 바로 다음에 위치시킴으로써 후세의 史家들이 “自置百濟郡”이란 구절이 百濟의 遼西 領有와 관계된 것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通典』에서는 “自置百濟郡”이란 구절을 百濟의 遼西 領有 기사가 아닌 百濟와 東晋왕조의 교류에 관한 기사에 위치시킴으로써 “自置百濟郡”이란 구절이 百濟의 遼西 領有와 관계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梁書』의 撰者도 “自置百濟郡”이란 구절 앞에 위치한 百濟의 遼西 領有에 관한 기사 끝에 終結語尾인 ‘矣’를 붙임으로써 “自置百濟郡”이란 구절과 앞의 구절이 관계가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기존 학계에서는 끊어읽기를 잘못하여 “自置百濟郡”이란 구절을 새로운 문장의 시작이 아니라 百濟의 遼西 領有 기사와 연결하여 잘못 이해하였던 것이다. “自置百濟郡”이란 구절이 百濟의 遼西 領有 기사 다음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百濟 遼西 領有 문제를 고찰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종전에는 “自置百濟郡”이란 구절을 百濟가 遼西에서 영유한 지역에 百濟郡을 설치한 것으로 보았으나, 이러한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自置百濟郡”이란 구절은 ‘百濟’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梁書』의 문장 구조 속에서 보면, 百濟가 遼西를 영유한 시점은 百濟가 ‘百濟’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이전이 되고, 이는 『梁職貢圖』에서 ‘百濟’가 아닌 ‘樂浪’이 遼西를 領有하였다고 한 사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北朝系 史書에서 百濟의 遼西 領有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 것도 百濟가 遼西를 領有할 당시 ‘百濟’라는 명칭을 아직 사용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百濟의 遼西 領有는 ‘百濟’라는 명칭이 中國 史書에 처음 보이는 344년 이전의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