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대당평백제국비명
Ⅲ. 각석 경위와 판독문
Ⅳ. 비명에 기록된 내용
Ⅴ. 비명이 알려주는 백제 멸망기의 역사
Ⅵ. 맺음말
요약
정림사지 5층 석탑에는 전체 글자 수가 2,126자에 달하는 장문의 기록이 새겨져 있다. 같은 내용이 궁궐 안에 있던 石槽에도 새겨져 있다. 이 기록은 백제 멸망 직후인 660년 8월 15일에 당의 소정방이 賀遂亮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고, 權懷素로 하여금 글씨를 쓰게 한 뒤 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다. 비명은 탑신에 직접 글자를 쓴 뒤 새긴 것으로 서예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한 기존의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비문의 글씨는 전반부는 대체적으로 단정하고 고른 편이지만, 중반부 이후 후반부로 갈수록 점차 글씨 크기도 고르지 않고 옹졸해진다.
비명에는 당이 백제를 정벌한 까닭과 출정한 당군의 편성 및 장수들에 대한 칭송,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인 포로와 백제 영토에 대한 처리 내용 등이 담겨져 있다. 모두 당의 백제 정벌을 합리화하고 종군 장수들을 미화하는 내용이다. 비명 후반부에는 하수량이 문장을 지은 까닭과 당의 백제 정벌을 찬양하는 글이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종군 장수들의 명단이 별도로 기록되어있다. 하수량은 스스로 문장에 재주가 있었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고,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며 백제 정벌에 대한 찬양문을 지어 정벌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정림사지는 사비성 한복판에 있어 여러 사람에게 잘 알려져 있고, 불교 국가였던 백제를 대표하는 중심적인 사찰이라는 상징적인 곳이었다. 여기에 서 있는 석탑에 백제를 멸망시킨 전공을 새긴 것은 백제인의 종교와 신앙을 짓밟는 야만적인 행위였다. 또한 궁월의 석조에도 같은 내용을 새긴 것은 더 이상 백제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멸망하였다는 것을 백제의 유민들에게 분명하게 인식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비명의 기록이 당과 적대적이었던 고구려와 동맹한 점과 의자왕의 실정을 부각시킴으로써 당의 백제 정벌이 천륜을 어긴 국가에 대한 정당한 정벌이라고 합리화시켰고, 소정방이 직접 거느렸던 당군의 공적을 기록한 공적비라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명은 백제 멸망기의 정치상황과 지방 지배체제, 호구상황 등을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비명은 멸망 당시 백제 태자가 扶餘隆이었고, 호구는 74만호 620만에 달할 정도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지방을 5방과 37군 250성으로 편제하였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