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는 육지와 달리 해류와 바람만 잘 이용할 줄 알면 많은 물자를 멀리까지 수송하여 광역 물류 네트워크를 활용한 부를 축적할 수 있다. 특히 거대한 만으로 형성된 발해만과 그 남쪽에 위치하여 지중해와 같은 지리적 특성을 갖는 황해에서는 해양력이 우월한 세력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기습적으로 군사력을 집중하여 투사하기에도 유리하다. 따라서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한 나라는 발해라는 평온한 바다를 지배하여 중원에 대한 세력투사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발해만은 길게 돌출된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묘도군도 덕분에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에도 해상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이점 때문에 환발해만 지역은 늘 부상하는 세력들의 각축 무대가 되었으며, 환발해 제해권은 시대를 막론하고 동북아 패권을 다투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중국 춘추시대 제환공 (齊桓公) 이후 중원 동편의 구이(九夷) 세력이 약화되면서 비옥한 토지를 배경으로 생산력이 우월한 중원 비해 고조선의 열세가 노정되었다. 제나라의 국력이 강성해지고 연나라가 전국칠웅으로 부상한 반면 고조선의 국력이 쇠퇴하는 국세 역전이 가속화되면서 기원전 4세기부터 고조선과 연나라의 전쟁이 잦아졌다. 연이은 진개의 고조선 침공과 위만의 고조선 장악 후 발해만 제해권을 상실한 고조선은 부여 등으로 계승되었지만 국세의 쇠락을 면할 수 없었다.
고조선 쇠망 후 공손씨 씨와 낙랑 등이 일시적으로 환발해만 무역망을 주도하였다 이어 백제가 남방 소국을 병합하여 세력을 키우면서 적극적으로 발해만 연안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을 시도하였다. 고구려 역시 내륙에서 동이계 주변국을 차례로 복속하여 광개토태왕 시기에 와서는 백제를 아우르고 광대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가 갈등관계에 들어가자 황해에서 동이계 세력이 일찍부터 구축해 놓은 해양네트워크가 약화되면서 제해권 장악에 유리한 등주 등 산동성의 주요 거점이 중원 왕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백제와 고구려 패망의 근저에는 황해 제해권 상실이라는 중요한 지정학적 요인이 그 배경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