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 故土 益山지방에서 현존하는 益山연동리 석조여래좌상 광배를 중심으로 하여 백제광배 양식의 위상을 살펴보았다. 益山연동리 석조여래자상광배나 瑞山磨崖三尊光背, 軍守里廢寺址出土金銅光背破片 등을 중심으로 命名한 「百濟式火焰文光背」를 생각할 수 있다. 600년경을 전후로 하여 성립된 「백제식화염문광배」들은 그들과 시대가 거의 同代인隋 · 初唐光背, 나아가 6세기후반 중국불상광배들과는 양식적으로 접근되지 않는다. 오히려 中國 6세기前半의 熙平(516∼517), 正光(520∼524), 普泰銘(532) 金銅光背등에서 그 原形的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백제에서 성립된 「백제식화염문광배」가 飛鳥時代의 대부분광배 즉 甲寅銘金銅一光三尊光背, 法隆寺의 金堂藥師如來坐像, 同. 金堂釋迦三尊光背, 戊子銘金銅一光三尊光背 등에서 그대로 반영 전수된다. 益山光背나 飛鳥光背 즉 「백제식화영문광배」의 편년이나 백제광배의 일부 명확하지 못한 문양의 기원, 原形되는 도상의 확인, 도상해석을 보다 더 쉽게 접근하게 해주며 특히 보주연화는, 인동당초문, 化佛의 原形確認은 물론 이 三文樣의 긴밀한 蓮華化生關係내지는 중국과 다른 施文方式의 전통까지 명확하게 발견하게 된다.이상에서 살펴본 益山光背와 같은 전형적인 「백제식화염문광배」는 백제말기 光背로 갈수록 그다지 찾아볼 수 없다. 이후의 백제광배는 6세기중엽이후의 중국광배 못지않은 형식적이며 無氣力한 화염문을 보여주고 여타의 문양도 圖式的으로 표현되는 흐름이 主流를 이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백제식화염문광배」에서 볼 수 있는 火焰文의 특징인 「三枝火焰尾」表現 그리고 火焰身과 火焰尾가 二分化된 光緣部 처리가 거의 망각되고, 陰刻細線, 光芒帶, 寶珠蓮華文, 蓮珠文등도 사라진다.
백제광배의 경향은 비록 燕岐碑像 가운데에서 계유명전씨아미타제존상과 같은 光背가 추구하는 불상장엄효과를 조형적으로 잘 표현한 예외가 있지만 백제광배에서 전체적으로 下代로 갈수록 거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나. 그것은 燕岐碑像에서 보듯이 매우 도식적인 상승됨과 紊亂된 형식의 解弛된 화염문으로 변화됨에서 잘 알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典形舟形光背인 통일신라광배와는 커다란 양식적 차이를 가지고 있는 古式舟形光背이자 「백제식화염문광배」의 전형적인 도상인 益山光背양식은 백제의 멸망과 함께 계승되지 않고 사라졌다. (맺음말 요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