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제 전쟁과 7세기 후반의 일본열도
2. 近江国 蒲生郡 神崎郡의 백제 유민
3. 近江의 백제 유민과 불교사원
4. 湖東式瓦와 渡来系氏族
5. 백제 전쟁의 귀국자와 사원조영
6. 맺음말
요약
663년 백촌강전투 이후 일본열도로 건너간 백제 유민은 일본 열도의 율령 국가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정부에 중용된 자도 많지만 한편에서는 지방에 정착한 사람들도 많이 존재했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문헌 기록에 남는 근강국 포생군의 유적들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에 남겨진 「귀실집사묘비」나 석탑사삼층석탑은 동 시대의 것은 아니지만 백제 유민의 기억에 관계된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 동 시대의 유적으로서 사원유적이 중요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석탑사의 근처에 위치하는 기전[카바타]폐사가 백제 유민과 관계된 사원이라고 추측하였다. 이사원의 창건와인 「호동식」軒瓦는 일본열도에서는 특이한 문양을 갖고 있고, 새롭게 한반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그 기점이 되는 사원이 근강[오오미]국애지[에치]군의 경야탑ノ총[가루노토오노츠카]폐사이며, 애지군의 유력자인 의지진씨[에치하타우지]로 추측된다.
의지진씨는 백촌강에서 활약한 박시전래진[에치노타쿠츠]를 배출했으며 백제 유민과도 접점을 가지고 있다. 이 의지진씨의 사원과 기전폐사가 기와에서 관계가 인정되는 것은, 5세기까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에 도래한 사람들이 7세기에 새로운 도래인의 정착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오래된 도래인이 기술이나 지식을 갱신하기 위해 새로운 도래인의 수용에 주력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백촌강에 참전한 일본 열도의 호족들이 귀국 후에 사원조영을 했다는 이야기는 『일본령이기』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유명한것이 비후국삼곡군(광도현(廣島縣))의 대령이 백제계 승려인 선사홍제와 함께 귀국하여 삼곡사[미타니데라]를 건설한 이야기이며, 그 무대라고 생각되는 三谷寺의 수막새와 전적기단이 그 증거라고 생각된다. 비슷한 사례는 각지에 더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문헌에 의해 판명된 사례로는 단마국조래군(병고현)의 신직이 대 신라 전쟁에 종군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에 대해, 현지의 법흥사폐사에서는 역시 한반도의 특색을 갖는 수막새가 출토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사례들은 결코 특수한 예가 아니고,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비슷한 사례는 더 많이 존재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7세기 후엽은 일본 열도에서 사원 조영이 급속히 진행된 시기이고, 새로운 기술자의 증대가 전망되기 때문이며, 중앙의 대사와는 다른 기와를 창건 시에 이용한 사원의 대부분은 이런 새로 도래한 승려와 기술자를 받아들인 것으로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백제 멸망에 의한 새로운 도래인의 활동이 중앙 정부 이외에도 인정되며, 일본 열도의 문명화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