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말갈 관계 연구사
Ⅲ. 말갈과 낙랑
Ⅳ. 말갈과 백제
Ⅴ. 낙랑과 백제 관계 고찰을 통한 말갈의 위치 고증
Ⅵ. 맺음말
요약
본 논문에서 말갈의 실체적 연구를 위하여 주요 주변국인 낙랑과 백제와 관계를 고찰하고, 낙랑과 백제 초기 도읍지를 토대로 말갈의 위치를 새롭게 비정하고 고증하고자 했다. 그 동안 말갈연구는 단편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오래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된 연구로 일관되어 왔다. 주변국 중에서 말갈과 가장 많은 관계 기록을 갖고 있는 백제와 말갈의 위치 고증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 관계 정립이 필요한 낙랑을 통해 말갈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낙랑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첫 번째, 난하 동부연안에 위치한 한사군의 낙랑군, 두 번째,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최리의 낙랑국, 세 번째, 낙랑국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자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낙랑국 자리에 후한 광무제가 설치한 낙랑이 있다. 이 중에서 말갈의 위치를 고증해 줄 수 있는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요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제는 말갈에 대응하기 위하여 성을 축성하고, 무기체계도 보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권강화를 통한 고대 국가로서 체제도 정비하였다. 즉, 말갈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오히려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중국사서에 표현한 것과 같이 동이 중에서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또한 백제왕계가 고이왕계로 바뀌면서 그렇게 싸우던 말갈과 친화적인 정책으로 전환한다. 말갈도 추장이 좋은 말 열 필을 선물로 백제왕에게 바친다. 그리고 고이왕은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진다. 고이왕계는 진씨 왕조로 북방에서 내려온 말갈계일 가능성이 높다. 말갈의 위치는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을 대전제로 해서 『삼국사기』의 기록과 중국사서 기록들을 종합하고 정황적인 근거를 통하여 비정하고 고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말갈은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연구를 제대로 안한 것이다. 본 연구에서 다시 한 번 느낀 것이지만 고대에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고대 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하여 강력한 고대 국가로 부상할 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에 낙랑처럼 이원화되어 국력이 집중이 안 되고, 다른 나라들과의 틈바구니 속에서 정체성이 약화되면 멸망의 기로에 놓이게 될 수 있음을 또한 알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갈과 관계 속에서 적극적으로 임한 백제는 강력한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고, 소극적이었던 낙랑은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 말갈은 최소한 삼국의 경쟁 구도 속에서 삼국 성립에 기여하였고, 삼국의 흥망성쇠 과정에서 역동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