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南北朝․隋․唐代 百濟의 對中國外交의 특성
Ⅲ. 중국의 百濟認識과 對外政策의 實際
Ⅳ. 맺음말
요약
백제나 신라는 모두 중국과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의 국제환경은 다자간의 외교정책을 필요로 했다. 각국은 국익에 따라 유리한 외교적 파트너를 선택적으로 접촉하고 협조를 요청하였다. 百濟는 北魏에게 高句麗의 정벌을 요청하였다. 隋․․唐朝에게도 계속해서 고구려에 대한 제압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은 대단히 외교적인 책략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북위, 수, 당조에서는 일관적으로 화해를 권유하며, 직접적 개입을 하지 않았다.
이 국가들이 고구려 토벌을 거절하였던 이유는 고구려가 여전히 조공을 보내고 있고, 문제가 될 만한 잘못을 하지 않았으므로 정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다. 外征에는 반드시 그에 걸맞는 名分이 필요하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는 “고구려는 본래 기자가 책봉되었던 땅이고, …”라는 명분이 내세워졌다. 백제의 경우는 그런 명분도 없이 전쟁에 휘말려 순식간에 멸국이라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위진남북조․수․당 시기 백제의 대중국 외교의 특성에 대해서는 먼저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 북조와의 비문화적 교류라는 특성을 지적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 발달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지리적으로 접근하기 좋은 남조와의 교류는 백제로서는 필수적인 외교 책략이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130년간의 5호 16국 시대동안 중국의 화북지대는 백제의 관심지역이 되지 못했으며, 북위에 의해 통일된 439년 이후에도 화북은 여전히 遊牧君主의 治下라는 편견이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472년 한 차례 북위와의 통교를 시도하였지만, 그 통교는 남조의 나라들과 해 왔던 문화적 교류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으며, 거의 군사적 동맹을 권하는 내용에 가까웠다. 백제의 이 제의가 거절되면서 백제와 북위는 멀어졌고, 이러한 사적은 北魏, 西魏, 東魏의 시대까지 이어졌다.
北齊와 北周가 건국된 수 몇 차례의 접촉이 있었지만 우호관계를 갖기도 전에 양국이 멸망하고, 중국은 수왕조에 의해서 통일됨으로써 이제 백제의 상대국은 수 왕조가 되었다. 계속해서 당 오아조로 이어지는 중국 통일왕조의 등장은 백제의 대중국 교섭국을 하나로 만들었다. 수․당 왕조의 등장으로 백제는 처음으로 대제국과의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중원에 등장한 강력한 제국은 주변지역에 대한 엄청난 흡입력을 가지고 있어서 삽시간에 많은 지역이 당의 羈縻府州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백제의 멸망은 당이 당제국의 동변을 기미부주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여기에는 대대로 화북에서 등장했던 北朝계열 왕조들이 가지고 있었던 백제라는 상대에 대한 몰이해와 그 북조의 세력을 계승한 수․당정권의 등장, 그리고 당의 기미지배체제의 등장이 관계되어 있다. 중국에서의 통일왕조의 재등장은 주변부에 대한 팽창을 가져왔고 결국 백제는 멸국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