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6세기 중반에 이미 전역을 5方의 광역으로 구분하고 方城이 예하에 여러 郡을 관할하는 지방행정체제를 構築하였다. 이후 백제는 영역 확장 속에서 새롭게 개척한 지역들도 이와 동일한 지방행정체제로 편성하였다.
한편 5方城과 難珍阿城(난라성) 자료로 볼 때 백제의 方城과 郡城의 내부는 모두 城과 城이 연결된 구조로 편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방어와 진격에 유리한 군사적 방어벨트를 만들어보려는 의도에서 기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후퇴한 백제는 이런 방식으로 군사적 방어와 진격을 제일 기준으로 지역과 지역, 城과 城을 연결하는 지방행정단위를 구상하였고, 그것이 바로 520~30년대의 22개 ‘檐魯’체제였다.
백제가 郡城에 그 지방관인 郡將을 3명이나 파견한 것은 군성의 구조, 즉 군성이 중심 성과 좌우 성을 연결시킨 구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또 「陳法子墓誌銘」으로 알 수 있듯이 백제의 군성은 대군/군의 등급이 있었고, 3인의 군장 내에도 서열이 있어 대군의 제1군장이 ‘대군장’으로 칭해졌다. 이러한 군성의 등급은 애초 담로가 균질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로 중에도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핵심 지역이 있었고, 백제는 이러한 대담로를 중심으로 주변의 담로들을 묶어 더욱 강한 광역의 군관구를 만들어갔다. 결국 이 대담로들이 다시 방성과 대군으로 2차 분화하여 안정화한 것이 방-군-성 체제였다.
백제 말기에 5방 37군 200성이 당의 점령기에 5도독부 37주 250현으로 변모하였는데, 영토가 늘어난 것도 아닌데 200성에서 250현으로 증가한 것은 5방 37군의 구조와 관련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즉 방성과 군성 내부의 小城들이 독립된 일반 城으로 분해되었다고 생각되며, 그것이 50개 정도였다는 점에서 37군의 구조가 균질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최전선의 郡城들만 난라성과 같은 구조였고, 군장이 3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복암리 목간으로 볼 때 나주 복암리 지역의 두힐성은 郡城이었고, 그 예하에 반나, 군나 등의 일반 성을 관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이 점령한 후에도 이러한 지방행정체계가 계승되었고, 단지 두힐의 군성만이 대방주와 죽군현으로 분해되었다. 그러나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달랐다. 『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신라는 군나, 반나 등을 관할하고 있던 두힐군의 지역권력구조를 해체하고, 두힐군의 행정적 위상을 격하시켜 발라군 하의 두힐현으로 배치하였다. 또 반나 지역을 독립시켰을 뿐만 아니라 군으로 위상을 높여 영산강 유역에 새로운 지역 권력구조를 정립하려고 하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