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동성왕의 귀국과 왜
III. 동성왕대 백제와 왜
IV. 단지리 횡혈묘와 전방후원형분
V. 맺음말
요약
본고는 동성왕대 倭系 세력의 동향을 규명한 논문이다. 왜는 동성왕의 세력기반이었고 그의 즉위 후에 나타난 가장 큰 현상은 왜계 유적들이 중앙과 지방에 축조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동성왕대 왜와의 관계를 통해 왜계 세력들의 동향을 살펴보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먼저, 동성왕의 귀국과 즉위 사실을 기록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사료 비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동성왕은 왜에서 귀국하여 왕에 즉위하였고, 이때 쓰쿠시국(筑紫國)의 군사가 호위하였다. 동성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近飛鳥 지역에 기반을 가졌고, 혈연적으로 왕위를 계승하기에 가장 근접하였으며,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성왕은 왕에 즉위한 후 왜와의 관계가 소원아형ㅆ다. 이는 동성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경략에 나섰고, 대중국 교류를 통제하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동성왕은 南濟에 內屬을 칭함으로써 대중국 교류를 독점하였으며, 이는 왜와의 갈등 요인이 되었다. 그 구페적인 실례로는 爾林에서의 충돌을 들수 있다. 왜계 인물인 紀生磐宿?는 임나로부터 이림을 확보하여 고구려와 통교하려고 하였으나 백제에 의해 격파되었다. 임나와 왱가 웅진 천도 직후 백제의 위기상황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시도하다 백제와 갈등을 빚은 것이다.
동성왕대 왜계 세력의 실체를 보여주는 물질자료는 橫穴墓와 前方後圓形墳이다. 금강 이북 단지리에는 왜계 무덤인 횡혈묘가 축조되었다. 피장자들은 동성왕이 귀국할 때 호위한 쓰쿠시국 국사와 연결시켜 군사·혹은 방어적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이 도성으로 입성하지 못한 것은 신분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며, 금강과 유구천의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교역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유력한 왜계 이물들은 웅진도성에 입성하여 동성왕 정권 초기에 활약하였다. 이들은 동성왕의 왕권 강화 정책에 따라 토착세력이 강한 영산강 일대에 왕·후로 파견되었다. 이 무렵 이 지역에 왜계 무덤인 전방후원형분이 축조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왜계 세력들은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동성왕의 의도에 의해 배치된 것이다. 대형의 전방후원형분을 축조하였고 최고의 위세품이 부장된 것을 고려하면, 이들은 동성왕이 귀국할 때 동반한 괘계 세력 중 최측근 인물로 보인다. 이들은 동성와 정권 초기에 중앙정계에서 활약하였지만 점차 밀려나 왜와 소원한 관계가 되었던 사실과도 일치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