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머리말
Ⅱ. 神功紀 49년조의 성격
Ⅲ. 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의 위치 검토
Ⅳ. 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과 마한 정벌
Ⅴ. 맺음말
요약
본고는 『日本書紀』 神功紀 49년조에 보이는 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에 대하여 고찰한 논문이다. 이들 지역의 위치와 지리적 성격, 그리고 근초고왕대 이들 지역에 대한 정벌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먼저 神功紀 49년조 기사는 『日本書紀』 찬자의 관점이 섞여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구별하였다. 이는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기사로, 백제의 입장에서 정벌의 단계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면에서 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의 항복 기사는 근초고왕 마한 정벌의 실체를 밝혀줄 수 있는 유용한 자료가 되었다. 이들 지역의 위치 비정은 4읍설과 5읍설이 있으나 ‘支半’과 ‘古四’가 각각의 지명 비정에 걸림돌이 됨으로써 확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두 견해 모두 이들 지역을 전북 일대로 비정할 수 있는 점에서 이 기사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이들 지역은 근초고왕이 전남 일대의 마한 세력을 정벌한 것과는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 백제의 근초고왕이 親征하자 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이 항복하였다. 이들 지역은 읍으로 표기되었다는 점에서 백제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고, 근초고왕의 친정 때 백제의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백제가 전북 일원으로 진출한 것을 보여주는 기사이며, 백제 중심으로 수정할 때 정벌의 1단계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고부 지역은 『翰苑』에 고부의 옛 세력인 狗素國을 포함시킬 정도로 마한 정벌의 한 획을 긋는 장소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부가 백제의 중방이 되는 것도 마한 세력의 통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神功紀 기사를 백제 중심의 정벌로 상치한다면 忱彌多禮에 이른 것은 2단계로 수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백제는 해안가 거점 중심으로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이 친정한 것이 아니라 木羅斤資라는 장수를 보내 이 지역을 확보하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南蠻’이라는 표기 자체는 1단계 지역을 ‘邑’으로 표기한 것과는 분명하게 차이가 난다. ‘屠戮’이라는 표현도 이 지역이 강한 저항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2단계는 백제의 영향력 하에서 복속한 1단계와 차별성이 있으며, 따라서 시차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가야 7국의 정벌은 사실이라기보다는 백제가 가야·왜와 통교한 사실을 보여주는 기사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 ‘多沙’라는 지명은 繼體紀 23년조에도 등장하기 때문에 후대의 사실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하여 근초고왕 때 남해안에 거점을 확보하고, 가야 지역에 교역로를 확보함으로써 왜와 통교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