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백제의 馬韓倂呑 시기와 범위
Ⅲ. 4~5세기 백제의 영역확장과 주변 소국
Ⅳ. 맺음말
요약
백제가 마한을 병탄한 시기와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설이 분분하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건국초기인 온조왕 때 이미 마한을 병탄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학자는 거의 없다. 고고학 연구성과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고학적으로 백제 영토확장 과정을 온전히 해석해내기도 어렵다. 문화양상과 정치상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백제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에는 남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근초고왕의 강렬한 군사활동, 백제와 倭의 활발한 교류 등이 주요 근거이다. 남해안을 영토화·세력화하지 않고서는 4~5세기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倭兵을 동원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백제와 倭 사이의 교통로 운영은 영역과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479년 加羅王 荷知가 한반도 서남부지역을 지나 바다 건너 南齊로 사신을 보내 本國王에 임명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백제 근초고왕은 옛 낙랑군의 지도력을 계승한 樂浪太守로서 가야 제국과 倭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을 것이며, 그것이 5세기 초에도 여전히 유효하였을 것이다.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왜적을 쫓아 任那加羅 從拔城까지 이르렀다는 광개토왕비문의 내용은 백제의 후방 지원체계를 붕괴시키려는 의도로 읽힌다.
백제가 6세기 이후에 전남지역을 영토화했다는 해석도 있다. 「梁職貢圖」의 ‘주변소국’관련 기록과 유적·유물의 문화적 특성을 근거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정치적 기준과 사회문화적 특성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판단한 것은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탐라가 공물을 바치지 않자 동성왕이 정벌하려 무진주까지 갔다가 사죄하므로 돌아왔다는 기록과 무령왕이 임나의 日本縣邑에 있는 백제 백성의 후손을 찾아내 모두 호적에 편입시켰다는 기록 등을 감안하면 늦어도 5세기말, 6세기 초에는 전남지역에 대한 행정편제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무력에 의한 강압적 복속은 정치·경제적 병합에 비해 사회·문화적 소통이 늦다는 사실을 참고해야 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