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전체 蕃將의 한 부류로서 高句麗・百濟系 蕃將의 특징을 고찰한 글이다. 연구 방법으로 高句麗・百濟系 蕃將의 墓誌銘과 유목민족 및 소그드계 蕃將의 墓誌銘을 상호 비교하였다.
高句麗・百濟系 蕃將 가운데 소그드계 蕃將처럼 唐이 수립되기 이전부터 중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던 사례는 극히 드물다. 전쟁을 매개로 入唐하였다는 점에서는 유목민족 출신 蕃將과 유사하지만, 휘하의 부락민을 이끌고 入唐한 것이 상용구처럼 사용된 유목민족 출신 蕃將과 달리 高句麗・百濟系 蕃將의 묘지명에는 遺民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오히려 개인의 군사적 능력과 황제와의 관계가 부각되었다. 그들은 개인적인 군사능력과 유력자와의 인적관계를 출세의 밑바탕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高句麗・百濟系 蕃將은 세대를 거듭하여 蕃將을 배출할 수 있었다.
유목민족 출신의 蕃將들은 자신들이 지휘하는 部落兵을 기반으로 唐의 대외전쟁에 참가하여, 軍功을 쌓으면서 唐에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그들에게 대외전쟁은 전리품을 획득하고 唐의 官銜을 수여받음으로써 자신의 지지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소그드인들은 ‘家業’이라는 세력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 蕃將의 세력기반인 遺民에 대한 지휘관계가 없었던 高句麗・百濟系 蕃將은, 唐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들의 군사적 능력이나 唐朝의 유력한 인물들과의 관계형성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蕃將에 대한 唐의 인식은 전쟁에 적합하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夷狄無信”의 불신도 공존하였다. 泉獻誠, 黑齒常之 등 유독 高句麗・百濟系 蕃將들이 모함으로 불행하게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던 이유도 이러한 취약한 지지기반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