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唐代 墓誌의 작성 과정과 자료적 성격
Ⅲ. 묘지의 기재 방식과 유민의 出身地
Ⅳ. 유민 묘지의 家系와 假託 현상
Ⅴ. 맺음말
요약
그동안 高句麗・百濟遺民 묘지의 출자 기록은 이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자료지만 泉男生의 묘지와 列傳을 비교해보면, 두 기록은 동일한 典據를 이용하였고, 그것이 일족이 唐 朝廷에 제출한 行狀이었음이 확인된다. 묘지의 제작을 위해서는 書家・石工 등 제 3자의 관여가 불가피하였다. 그 제작과정으로 보아 묘지는 私的인 기록이면서 公的인 성격을 띤 자료라서 정체성과 같은 자의식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 자료로 여길 수 없겠다. 행장이 墓主의 활약상을 唐朝로부터 평가받고자 하는데 있었던 만큼 이를 전거로 삼은 묘지도 이 같은 성격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본다.
묘주의 출자는 先代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자세하게 기술하기도 하지만, 그 계보를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경우도 보인다. 전자는 그가 고구려 國政을 오로지했던 가문 출신으로 그의 귀부로 고구려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고족유의 것은 당 장수로서의 활약상만으로 그 이력을 채웠다. 이로 보아 계보를 포함한 망자의 이력 가운데 어떤 내용이 당조의 평가를 더 받을 것인가를 고려한 유민들의 전략적 선택이 있었고, 그것이 묘지 간 기술 내용의 차이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출신지는 출자를 구성하는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로, 일정한 양식에 따라 작성되었다. 유민은 망국에 따라 당의 臣民으로 편입된 까닭에, 본적을 떠나 현재의 거주지에 안치된 경위는 就官의 유래와 歷官을 언급하기 위해 꼭 필요한 내용이었다. 이에 본적과 새로 얻은 貫籍을 기재하여 출신지의 변화상을 보이는 것이 상례였지만, 하나만을 기재한 경우도 보인다. 이는 망자의 활약상을 돋보이게 고려한 기술방식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묘주의 출신지를 ‘遼東郡 平壤城人’이나 ‘熊津 嵎夷人’이라 기술한 것은 망자가 어디 소속의 지역 출신임을 밝히고 ‘都督府+지역’의 기재방식에 따른 것이다. 이는 당대 대표적 유민집단인 突厥人에게서도 동일한 기술을 찾을 수 있다.
일부 묘지에는 조상의 기원을 중국 전설상의 인물이나 유명인에 두고 그 후손임을 자처한 사례들이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유민 1세대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계보인식의 변화라고는 볼 수 없다. 돌궐인과 소그드인에게서도 동일한 현상이 보인다는 점에서 이민족으로 당에 정착하게 된 이들의 생존전략이었다고 이해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