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묘지의 연구와 祢軍의 生涯
Ⅱ. “熊津 嵎夷人”
Ⅲ. 日本에 대한 여러 견해
Ⅳ. “日本”과 “風谷”
Ⅴ. “盖馬”와 “原虵”
Ⅵ. “海左”, “瀛東”과 “僭帝”
Ⅶ. 맺음말을 대신하여 -墓誌의 書法과 “日本”
요약
百濟 滅亡期 前後의 激動期를 살다간 國際人 祢軍의 墓誌銘에는 “日本”을 비롯해 알기 어려운 여러 용어와 표현이 보이는데, 이는 同時期 類似資料와의 比較 檢討를 通해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동생이나 후손과 달리 “熊津嵎夷人”을 자칭한 것은, 熊津 都督府의 핵심 관리였음을 자처한 것이었다. 묘지의 “日本(餘噍)”와 “風谷(遺甿)”은 『平濟碑』 劉仁願紀功碑를 참고하면, 백제의 저항세력이다. “日本(餘噍)”의 근거로 묘사된 “扶桑”은 州柔城이나 任存城과 같은 백제저항세력의 근거지로 보인다. “日本(餘噍)”는 餘自信,谷那晉首과 같이 唐에 저항하다가 日本으로 亡命한 세력 혹은 扶餘豊(豊王,豊璋)과 같이 日本의 후원받아 唐에 저항한 세력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百濟를 高句麗와 연관 짓는 표현이 있는 扶餘隆묘지를 참고하면, 祢軍墓誌의 “風谷”은 高句麗일 가능성이 크다. 또 箕子朝鮮의 末王인 箕準이 韓(馬韓) 金馬郡에 내려왔다는 說話를 참조하면 “風谷遺甿”을 百濟 혹 馬韓으로 볼 여지도 있다. 風谷遺甿은 遲受信, 福信과 같이 高句麗의 지원을 요청하거나 뒤에 高句麗로 망명하게 된 세력, 또는 외부의 후원 없이 원래 百濟에 있던 세력을 가리킬 수 있다. 즉, “風谷”과 “盤桃”은 百濟나 高句麗로 한정된다. “盖馬”와 “原虵” 는 高句麗와 百濟로 보인다. “萬騎亘野”와 “千艘橫波”는 唐의 육군과 수군의 군사활동을 가리킨다.백제부흥군의 수반이었던 扶餘豊(豊王)은 663년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663년 주류성의 백제부흥군 역시 신라군에 패배하자, 백제 부흥군의 王子 扶餘忠勝 등은 왜군과 함께 唐, 新羅軍에 항복하게 되었고, 부흥군의 한축이었던 餘自信 등은 가족을 이끌고 倭로 망명하였고, 지수신은 흑치상지가 선두에 선唐軍에게 패배하고 高句麗로 피신하였다. “萬騎”와 “千艘”는 백제부흥군과 이들을 지원한 왜군과 교전한 唐軍 혹은 新羅軍의 陸軍과 水軍을 가리킬 수 있다. 泉男生묘지에서 “蓋馬”, 평제비의 “虵”의 용법을 참조하면, 예군묘지의 “蓋馬”는 고구려로 보이며, 그와 대구가 되는 “原虵”는 백제나 왜로 보인다. “海左”, “瀛東”은 고대동방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僭帝”는 백제멸망 이후부터의 사건이기 때문에 고구려는 666년 당의 泰山封禪 때 고구려왕 高藏(보장왕)의 아들을 파견하여 배석한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둔다. 묘지명의 중의적 표현은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고 주변에 새로운 질서가 강요되면서, 정치적 입장에 변화하는 격동기 동아시아의 정치적 현실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