竹幕洞遺蹟은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백제시기 국가가 주체가 된 제사이며, 시기적으로는 출토된 유물과 문헌기록을 통하여 볼 때 백제의 근초고왕대(346~374)로 보인다. 근초고왕대는 활발한 정복사업이 이루어졌는데 정복한 지역의 군사적 요충지인 이곳에 제장을 설치하여 정복이데올로기로서 활용하고자 한 것이라 파악하였다.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군사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그 유물에 무기와 마구류가 출토되었다. 또한 통일전쟁 직후에는 유믈이 나타나지 않는데 이것은 신라가 이곳을 정복한 후 이곳의 제사를 단절시켰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다 8~9세기에 다시 유물이 나타나지만 그 수량이 적어지는 것은 이제 제사의 주체가 국가가 아니고 지역의 토착세력이 이를 담당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통일전쟁 후 신라의 제사체계에 편성되지 못하다가 신라하대 신라정부의 통치력이 약화된 후 지방의 호족세력이 등장하여 이 지역의 지역민들을 통합하기 위한 방편으로 과거 백제의 국가제사의 대상이었던 곳을 다시 제장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았다. 이후 언제인가 이곳이 민간신앙의 제장이 되면서 해상의 안전과 풍어를 위한 제장으로 그 성격이 전환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 시기에 구체적인 설정은 보다 세밀한 유물분석과 문헌조사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