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대문화 속에는 다양한 점술이 존재하였지만 그 해석에 있어서 음과 양의 대립과 그 특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음양의 화합과 융화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고구려는 역학의 전문가로 보여지는 日者가 있어 음양오행을 이용한 자연이해와 이상 현상에 대한 災異說的 해석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이미 1세기부터 재이설적 해석에 만족하지 않고 禍福觀이 대두되었다. 아울러 역학을 활용한 천문 역법이 발전하였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는 고구려 역학의 활용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이다. 이것은 사후세계에 대한 이해도 역학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백제는 다양한 종족 구성과 개방적 문화의 특성으로 인해 학술이 다양하게 발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역학이 크게 강조되고 발전하였다. 오경박사인 주역박사 외에 따로 역박사를 둘 만큼 역학이 발전하였다. 그리고 중국 남조의 송에서 역서인 『역림』과 식점이 수입되어 전문화되었다. 또한 활발한 국제교류를 통하여 학문적 수준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역학의 원리를 활용하여 관제와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으며, 일본에 易博士와 그 응용분야인 曆博士 醫博士 등을 파견하여 일본 易學의 효시가 되었다.
신라에서도 초기부터 일부 지식인들은 역학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은 易의 乾道를 따르는 수양자세를 보였으며, 선덕여왕은 역학을 전쟁에 활용하였다. 김유신은 역학의 재이설적 해석을 넘어서서 보다 합리적인 자연이해와 덕성의 涵養을 강조하였다. 유교사상을 활용하여 국가체제를 새롭게 정비한 신문왕의 만파식적 逸話는 利見臺에서 용이 된 성왕 문무왕을 만나는 즉 “飛龍在天 利見大人”하는 『周易』 乾卦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역학의 핵심은 재이설적 길흉판단이 아닌 천지와 더불어 합덕하는 대덕의 함양이라는 수준에까지 도달하였다.
삼국시대 역학사상은 화합과 융화, 인간과 덕성을 중시하는 한국고대정신의 전통을 계승하여 다음과 같이 발전하였다. 첫째, 이 시대의 역학사상은 전문가인 日者․日官․卜士․卜筮之士가 易理를 활용하여 자연현상과 점괘 기타 조짐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해석하여 길흉을 판단하는 점술의 도구로써 활용되었다. 둘째, 역리를 바탕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천문, 역법, 의약, 건축, 기타의 과학과 기술로써 응용되었다. 셋째, 일부 지식인들은 비록 소수이지만 역학의 핵심을 단순한 재이설적 길흉해석을 넘어서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인간의 화복은 행위의 선악에 달려 있으므로 덕성을 함양해야 한다는 합리적 윤리적인 역학 이해 단계까지 도달해 있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