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정사 백제전은 중국인들이 그들 역사의 일부분으로 기록한 그들의 역사기록이다. 그러므로 중국사가 아닌 백제국 역사로 이해하기 위해서 철저한 사료적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검토 가운데서도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중국정사 백제전 찬수시의 백제에 대한 그들의 관념과 인식이다.
남북시대 중국정사 백제전이 찬수된 것은 송서, 남제서, 위서이고 양서, 주서, 남사, 북사 등은 당초에 찬수되었지만 내용이나 체제에서 남북조대의 전통을 따른다. 이는 중국인들이 그 시대의 자료와 관념에 충실을 기한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남북조시대 중국정사 백제전 내용은 북조계 사서인 위서, 주서, 북사의 내용과 남조계 사서인 송서, 남제서, 양서, 남사 등 내용에서 백제에 대한 관념과 인식상에서 뚜렷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남조에서는 계속하여 고구려, 백제에게 모두 낙랑, 대방과 관련된 봉책을 실시하여 그들 중심의 역사관에서 당시적인 백제나 고구려를 주체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전통적인 동이에 대한 범칭으로서 낙랑과 대방을 모두에게 연루시켜 백제와 고구려를 막연히 그들의 역사 속에 편제시킨 것이다. 이에 대해 북조에서는 연대에는 남조에서와 같은 혼란이 있었으나 위대 이래 북조국가에서는 고구려왕엔 요동군개국공, 백제왕에겐 대방군공 등의 개국과 관련된 당시적이고 구체화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남북조대 중국정사의 백제국에 대한 위치관계 기록의 분석에서도 동일하다. 남조계 사서들이 전하는 위치 기록은 시대착오적인 대방이 중요한 위치의 기준이 되고 내용도 상당히 의례적인 막연한 상태적 기술이다. 그러나 북조계 사서들은 당시적인 지명들이 기준이 되고 내용 또한 상당히 구체적이다. 때문에 남조계 사서들의 내용보다는 북조계 사서들의 내용이 상당히 당시적이고 구체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남북조시대의 특수한 대립적 상태 속에서의 지리적 관계와 당시 남조 및 북조에서의 백제에 대한 관념상의 차이에서 연유된 찬수태도 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남북조대의 이러한 관념은 수당대를 지나면서 더욱 도식적이고 중화주의적으로 인식하였다. 수당대는 그들 중심의 중화주의적 관념에 의해 동이에 고구려, 백제, 신라를 기록하고 고구려에는 요동군왕, 백제에는 대방군왕, 신라에는 낙랑군왕 봉책을 실시한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