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소재 이성산성 내 저수지에서 목간이 출토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본고는 목간의 내용을 고유명사의 나열로서가 아니라 문장으로서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여기서 확인된 내용을 토대로 이성산성의 본래 이름과 당시 이성산성과 그 주변의 상황 등을 구명하여 목간의 작성 배경을 밝히고자 한다.
무진명 목간에서는 이자체가 확인되었고 남아 있는 자획을 통해 글자 판독이 가능하였다. 그 결과 새로운 석문의 작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명문의 해석은 “무진년 정월 십이일에 무리로 남한성도사… 수성도사촌주가 죽은 즉, 남한성이 고적하게 되었고…성<>에는 황토(혹은, 묘)가 찼으므로(혹은, 웅덩이에는 황토가 가득하므로) <정비·보수가 시급하다>”라고 되어진다.
목간의 성격은 현지의 일선 지휘관들이 전사한 관계로 피폐해진 남한성의 정비, 보수를 위한 하달문건으로 해석되었다. 목간에는 남한성에 대한 직접 언급이 2군데, 그리고 간접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이 1군데가 된다. 이는 그 목간이 출토된 이성산성의 본디 성명이 남한성임을 나타내준다.
목간의 작성 연대는 남한성도사를 비롯하여 한강유역에 소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성의 도사와 촌주 등이 참전하여 전사하게 되는 시점과 결부지어 살펴보아야만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원광의 걸사표를 전후한 기록을 살펴볼 때, 607년경에서 608년 2월 사이에 고구려와 신라와의 교전이 있었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 608년 2월에는 고구려 군대가 신라 북경을 침략하여 8천인을 약취해 가는 전과를 남긴다. 따라서 목간의 무진년 정월 12일은 608년의 이 전역으로 보면 무난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목간의 작성 시점으로부터 과거가 된 사실에 대한 언급이므로 그것의 작성시기는 608년 이후 어느 때로 추정된다.
목간의 작성자는 누구인가하는 문제가 남는데 신주군주일 가능성이 높다. 남한성의 위상 내지는 성격에 관해서는 후일의 과제로 넘긴다. 다만 몇가지 점만을 제기해 두고자 한다. 이 목간의 내용을 볼 때, 남한성과 수성이 어떠한 형태로든 관련을 맺음을 알게 된다. 비록 목간이 출토된 장소가 남한성이기도 하기 때문이겠지만 남한성도사가 수성도사보다 먼저 적혀있고 남한성에 관한 언급이 주를 이루는 바, 수성은 남한성의 종적 존재인듯한 인상을 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