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칠지도 명문 해석에 대한 고찰이다. 표면의 문구는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 정양에 백번 단련한 철기로 칠지도를 만들었는데 모든 병해를 물리칠 수 있으며 편안히 후왕으로 나아가는 게 마땅하다. (아무개가 이 칼을) 제작하였다”라고 해석된다. 이면은 “선세 이후 이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 치세에 (이 칼이) 귀하게 생겨남이 있었으므로, 성상의 말씀으로 짐짓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로 혹은 “선세 이래 이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묘하게 얻은 성스러운 소식이 생겼으므로,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로 해석된다. 이밖에 “백제왕 치세에 기묘하게 얻었음을 성스럽게 고하는 까닭에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이같은 해석을 토대로 그 제작 연대는 태화 4년 인 369년이 된다. 명문의 내용을 볼 때 백제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사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해석은 근초고왕이 대열에서 황색기치를 사용하였던 황제적 위세와도 부합된다.
칠지도 사여 동기는 당시 백제 중앙이 복속시책의 일환으로 동진제 청자 및 초두를 분여한 사실과 동일한 시각에서 접근하게 옳지 않을까 한다. 칠지도는 권력의 상징인 도검류이긴 하지만 칠지가 상징하는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그 형태를 볼 때 실용성 없는 종교성이 농후한 무구로서의 성격이 다분하다. 그렇다면 군사 지배 다음의 제사권까지 장악한 왕자로서의 백제왕이 그 초월적 권위를 과시함을 알 수 있다. 칠지도가 제작되는 369년은 백제가 마한을 통합하는 기념비적인 해이거니와 이때 백제는 마한연맹의 제사권까지 장악하였으릴 짐작되기에 그것과 관련지어 봤다. 나아가 백제왕은 일국의 정치와 종교 공동체의 구심체로서의 상징성을 띤 칠지도를 다시금 제작하여 왜왕에게 사여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 목적은 일본열도를 대표하는 수장으로서의 그 독자적인 지위를 승인하는 한편 양국간의 종주, 신속관계라는 질서를 설정하여 백제왕의 권력범위를 확대하려는 데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 맺음말)